신유(神癒) 구출하기

앰뷸런스가 지나가면 차들이 비켜준다. 생명이 걸려있어서다. 오늘날 사회가 옛날보다 나은 점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가운데 고마운 것이 개인의 인권과 생명에 대한 법의 보장이다. 사람으로서 한 생명의 존엄성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또 존중받고 있다.

어느 나라든 퍼스트레이디가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장애인이든, 빈곤층이든, 소년소녀 가장이든, 노약자든… 어떤 상황이든 그 사회의 평균적 삶에서 한참 아래로 쳐져있는 또는 가장 아래 계층에 떨어져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저렇게 어려워서 어떻게 사나’ 할 정도로 어려운 사람들을 누가 도우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귀하게 본다. 사람의 역사에서 늘 그랬다.

어느 생명체나 그렇지만 인간 종(種)에서도 서로 사이에 두 가지 관계가 병존한다. 경쟁심과 연대감이다.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할 때는 경쟁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나 약하거나 어려워서 자신과 전혀 경쟁이 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발동한다. 본능적인 종의 연대감이다. 퍼스트레이디나 지도자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이런 것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서 가장 고전적인 게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과 굶는 사람 먹이는 것이다. 몸 아픈 것을 치료하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선행이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적 치료와 의학적 치료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니었다. 종교적인 신적 치료가 기본이었고 의술은 보조였다. 신유(神癒:신적인 치유)는 이런 맥락과 연관돼 있다.

요즘 사람에게 건강에 견줄 관심사가 없다. 건강하게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체 생명의 최대한 연장과 신체 미모의 최상급 관리에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이와 연관된 시장 규모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건강 식품, 보험, 피트니스, 각종 성형, 신체 중 일부의 의학적 교체, 줄기세포를 비롯한 유전자 공학에 의한 부분적 재생, 비티(BT) 산업….

신유 곧 ‘신적인 병의 치료’는 조금만 비틀면 현대인에게 아주 매력적인 주제가 된다. 종교인이 자기 이익을 위해 기가 막히게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정신 치료 기법 준용, 의도적인 심리적 암시 효과 이용, 최면 같은 심리 장치 활용 등을 하나님의 역사로 가장할 수 있다. 확정적인 치유 선언을 하고 병이 낫지 않아도 문제될 게 없다. 병이 낫지 않은 사람이 분하다고 생각한다든지 사기라고 떠벌리는 일은 없다. 그러나 어쩌다 한 명이라도 병이 나으면 크게 홍보 효과를 낼 수 있다.

사중복음의 네 항목에서 유독 신유는 현대인에게 아주 매력적인 주제다. 그런 만큼 성경적인 신유에서 일탈할 가능성도 크다. 영적인 탄생인 중생이나 전인격적인 성숙인 성결이나 존재하는 모든 역사가 끝나는 일과 연관된 재림은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다. 신유는 다르다. 조금만 현대적으로 각색하면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

관상과 명상, 긍정적 사고와 감사 훈련, 상담이나 각종 영성 훈련…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특징이기도 한 이런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그에 대한 사람의 믿음에 따른 병의 치료’는 경계선이 모호해졌다. 모더니즘 시대에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병의 치료 외에는 모두 미신으로 밀어붙였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병의 치료는 오히려 설 자리가 있었다.

신유에 대하여 성경 말씀을 다시 처음부터 샅샅이 살펴야 한다. 목회적 수단이나 개인적 명성을 위한 신유가 비성경적임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있었던 치유, 그 잃어버린 보물을 구출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선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연관되지 않으면 성경적인 신유가 아니란 점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존재하는 세계 모두와 영원한 시간을 포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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