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하고 사체를 토막 내 유기한 50대 개척교회 목사라는 자가 범행 16개월 만에 수사망이 좁혀오자 경찰에 자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어느 교파 소속인지, 신학교육은 제대로 받았는지, 안수받은 진짜 목사인지 알 길이 없는 자가 목사 얼굴에 X칠했다고 많은 목사들은 낯뜨거워했다. 무엇보다도 짐승보다 못한 부끄러운 일을 저질러 놓고도 이런 저런 핑계를 둘러대는 후안무치에 목사들은 차라리 당황스러워 했다.

▨… 그가 무늬만 목사라고 하더라도 옳고 그름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였다면 아무리 아내에 대해 화가 났었다고 하더라도 살해만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이해가 겨자씨만큼도 없는 자가 목사라니… 어쩌다가 한국교회 풍토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목사가 정의의 사도나 수호자는 아닐지라도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는 물꼬를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는 도무지 정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양두구육으로 정의사회를 내세웠던 독재집단 탓인지는 모르지만 오늘의 시대에서는 정의운운하면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꼴로들 보기 십상이다. 한때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렇게도 좋은(?) 말들이 만국기 깃발처럼 나부꼈음에도 정의란 말은 아예 그림자조차 깃들여지지 않았었다. 신학교육도 예외는 아니었었다.

▨… 목사들은 사랑만 설교하고 사랑만 실천하면 끝나는 것일까? 브루너(E. Brunner)는 “정의는 사랑과 비교할 때 가치가 더 낮은 것 또는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 제도 속에서 살아갈 때는 사랑을 정의로 변경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못 박았다. 그에 의하면 정의가 배제된 사랑은 감상적인 사랑에 불과하고 이런 사랑은 정의의 모든 제도를 파괴하고 해소시키는 독약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 정의는 언제나 사랑의 선행조건이다. 사랑은 정의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할 수는 있으나 그 이하의 것을 행할 수는 없다. 사랑은 결단코 정의와 무관할 수 없다. 언제까지 정의가 배제된 감상적 사랑에만 매어달릴 것인가?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벧후3:13) 지난 세월 권력이 무서워 정의를 말하지 못했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무엇 때문에 입을 다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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