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됐다. 우리 민족이 경험한 6.25전쟁의 아픔은 분단의 현실을 포함하여 여전히 우리 민족의 가슴에 한(限)이 되고 있다.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된 전쟁에서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고아, 그리고 1천여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생겨났으며 군인을 포함하여 양측에서 200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실로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너무나 아프고 아픈 일이다.
이율배반적인 인간
인간은 왜 전쟁을 하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에서 전쟁은 “국가와 같은 정치적 집단간의 투쟁으로서 장기간 또는 대규모의 무력충돌을 수반하는 적대적 행위”을 말한다. 일정한 내전형식의 갈등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국가 상호간, 특히 주권국가 상호간에 행해지는 조직적인 무력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력투쟁에서 빚어지는 엄청난 비극을 보면서도 과연 우리 인간들은 이 전쟁을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정당하고도 집행 가능한 국가의 정치행위(Clausewitz, Vom Krige, 1966)"라고 정의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러한 이해가 가당한 것일까?
이 투쟁, 아무도 책임질 수 없을 대규모 반인륜적 파괴행위에 치를 떨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을 자행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인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한다. 너무나 자명하기에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이 악의 현실을 그냥 방치한 채로 그 죄악을 저지르는 이율배반 그 자체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인간
혹자는 전쟁이 인간의 천성적인 내적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심리적 요인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여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 갈등의 양상을 인간에게까지 유추 해석하는 동물행동학자·심리학자·정신분석학자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전쟁의 원인은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들은 전쟁을 사회적 의사결정의 오류이거나 왜곡된 경제적 요인에서 찾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모든 이론이 그렇듯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전쟁을 민족주의와 특수 이익집단의 돌출행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다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 답답한 한계를 넘어서 오히려 우리가 주목하면서 여기에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전쟁의 원인이 아니라 그 전쟁과 연관된 모든 역사의 현실이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설립된 UN이라는 기구가 보여주듯, 비록 인간은 전쟁을 피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전쟁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기가 막힌 현실인 것이다. 실제로 역사의 대부분은 항상 정당한 전쟁의 기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고대의 전쟁들은 항상 신들의 전쟁이었고 그래서 거기에는 거룩한 목적이 있었다. 중세 이후에는 희생에서 비롯되는 명예가 전쟁을 정당화 시켜 주었다. 국가의 총력전이 되 버린 현대에 와서는 이제 전쟁은 주권국가가 가지고 있는 정당한 정치적 수단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없는 세상
그렇다면 교회와 성서는 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성서에서도 거룩한 전쟁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이 답답한 현실을 보면서 성서의 말씀을 적용하고자 할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갖고 있음을 본다. 구약의 폰 라드(Von Rad)는 성전(聖戰)개념을 연구하면서 구약의 성전개념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수단으로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신약은 그 거룩한 전쟁을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수행하셨으며 부활을 통해 승리한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비록 교회의 역사가 다시 일정한 조건하에서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으로 주어진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그 어떤 전쟁일지라도 그것을 정당하게나, 혹은 부당하게도 만들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쟁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전쟁 때문에 희망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