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여 나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엉터리라고 거절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신뢰 속에 존재할 수 있는가를 보려고 하였다. …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내가 생각해 보려고 원하는 동안에,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라는 진리가 너무도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어서, 가장 과장이 심한 회의론자의 주장도 그런 진리를 흔들어 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그러한 진리를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내가 탐구하려고 하였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데카르트, 방법서설, 김형효 역, 삼성출판사, 1985, 74).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 1596~1650)의 저 유명한 명제다. 이 명제가 포함된 ‘방법서설’은 1637년에 발간되었다. 데카르트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로 보았다. 철학이나 도덕적 통찰이 해답까지는 될 수 없어도 문제를 바르고 깊게 인식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 본질을 생각하는 것에서 찾은 것은 탁월한 관찰이다.
데카르트보다 한 세대 뒤 사람인 블레어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도 사람이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과 다른 점을 생각한다는 데서 찾았다. 물리적이며 생리적인 능력으로 보면 사람은 피조물 중에서 약한 존재다. 갈대처럼 약하다. 그러나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 ‘생각하는 갈대’인 것이다.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에 주인으로 모시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것은 시작이다. 이 때부터 그리스인답게 사는 일이 비로소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 또는 그리스도인답게 인격이 성숙하는 일이 성결이다. 믿음이 올바르고 올곧게 깊어지는 모든 과정에 연관된 가장 중요한 영역이 생각이다. 생각이 정신과 영혼의 움직임이라면, 생각이 작동하는 마당이 마음이다.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 곧 생각에 있다.
저 유명한 잠언 말씀을 떠올려보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마음이 곧 생명이요 사람의 존재다. 사람의 본질이 그 사람의 생각에 있다는 잠언 23장 7절 전반도 같은 맥락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하나님이 사람을 보실 때도 생각을 보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세기 6:5). 하나님이 중심을 보신다는 말이 마음자리와 거기에서 일어나는 활동 곧 생각이 어떠한가를 보신다는 뜻이다. 마귀도 이것을 잘 안다. 어떤 사람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면 마귀는 먼저 그 사람의 생각에 자기 뜻을 넣는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복음 13:2).
모든 인격적인 존재의 중심이 마음이며 생각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핵심이 여기에 있다. 사람은 생각하는 데서 사람이다. 성결의 과정은 내 마음에 주인으로 모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정확하게 초점을 잡아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까닭이 이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아예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한 것이 이런 맥락의 절정이다.
마음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 주님께 인정받는다. 마음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다. 마음의 동기가 순결해져야 한다. 그래서, 문제는 마음자리와 그 생각을 훈련하는 것이다. 그것은 묵상으로만 된다. 묵상의 대상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더 직접적으로는 66권 성경이다. 이 초점을 흐리면 일반적인 종교 방법론으로 빠진다. ‘말씀-묵상’이 성결의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