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조건
누구나 아는 얘기가 좋다. 성경에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고. 중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 말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에는 권세가 걸려 있다. 권세의 헬라어 ‘엑수시아’는 전권이라고 하면 느낌이 더 강하다. 지금 권세에 대해서 말할 문맥은 아니다. 그냥 하늘의 전권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잠깐 생각하면 된다.
이 전권을 받고 누리는 방법이 믿는 것 또는 영접하는 것이다. 같은 행동을 다르게 표현한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쉬운가? 많은 사람이 믿는 것이 더 쉽다고 답한다. 그러나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행동이다.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설명하기 어렵다. 믿는다는 것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말이 막히기 십상이다.
영접한다는 것은 어떤가? 쉽다. 사람을 환영하며 맞이한다는 것 아닌가.
영접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이 창조의 주님이며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참 빛이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고 가정하자. 육신을 가진 모습으로 말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영적’이라는 표현 아래 얼마나 많은 신앙적 보배가 값싸게 취급되는가! 참된 믿음은 언제나 육신적이며 물리적인 영역을 변화시킨다.
상황이 이렇다. 전날 밤 3시 정도까지 뭘 하다가 잠들어 아침 늦게까지 혼자서 잠자고 있다. 누가 문을 두드린다. (아파트면 초인종이 울린다고 상상하라.) 눈을 비비고 일어나 묻는다. “누구세요?” “나, 예수다.”
이런, 어떻게 하겠는가? 신앙인들이 얼른 대답하는 게 이런 것들이다. 문을 연다, 감격해서 무릎을 꿇는다, 너무 감격해서 문도 못 열고 당황한다…. 잠깐, 생각해보라. 예수님이 육신의 모습으로 집에 오신 적이 있는가? 혼자 집에 있는데 ‘나 예수다’ 하는 남자 목소리를 듣고 감격하며 문을 열어준다고? 실제 상황이라면 말이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더구나 집에 있는 사람이 여자라면 어떻게 문을 열겠는가. 어쨌든 다시 한 번 분명히 하자. 실제 상황이라는 것 말이다.
글 길이 때문에 진행 상황은 생략한다. 자, 예수님이라는 게 확인되었다. 이단 집단인지 정신병자인지, 불안해서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여자라면, 남편한테 급히 전화하려고 했을 테고.) 이제 진행은 간단하다. 문을 연다. 예수님이 서 계시다. 감격, 감동, 기쁨 … 뭐 이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들어오시라고 말씀드린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네 초청은 고맙지만, 두 가지 조건이 있다. 네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 들어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네 집에 들어갈 수 없다.”, “주님,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첫째, 나는 한 번 들어가면 평생 같이 산다. 둘째, 나는 손님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들어가면서부터 내가 주인할 거다.”
자, 어떻게 할 건가? 쉽게 이렇게 대답하지 마시라. ‘주님이 당연히 제 삶의 주인이시고, 또 평생 같이 사시는 거죠, 당연합니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영적으로 당신의 마음에서 주인이시고 영원히 같이 계시다. 그러나 지금 오신 분은 육신을 갖고 계시다. 어느 방을 드릴 건가, 그분이 주인이니까 월급을 타면 그분께 먼저 갖다 드려야 한다는 걸 기억하라, 불편한 일은 없겠는가, 같이 사니까 내 삶의 모든 게 다 드러난다는 건 기본이다 ….
그리스도인들의 답이 대부분 이렇다. ‘일단은 들어오시라고 해야지요, 뭐 어쨌든 우선은 두 가지 조건을 수락해야지요, 쉽지는 않지만 모셔야지요….’ 이런 대답에 마음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 삶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우리 현실이 비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이 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적어도 이런 심정으로라도 두 가지 조건을 수락하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신다면, 그 사람은 중생한 사람이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게 이것이다. 영접했으니 하나님의 자녀다. 이것이 중생이다. 그리고, 두 가지 조건은 살면서 계속 성숙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