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신학자 리처드 니버는 그의 책 “책임적 자아”에서 사람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양태를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모든 행동의 표준을 자신이 세워 놓은 목적에 두고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목적이 세워지면 철저하게 행동해 나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나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지 않고 오직 목적 그것에만 절대시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행동의 표준을 법 또는 어떤 규범에 두고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퍽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과거에 얽매이기 쉽고, 형식적인 정당성만 찾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 자기 곁에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공동체의 발전에 대해서는 폐쇄적입니다. 다만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짙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책임에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책임이란 말은 너와 나의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며, 동시에 역사와 나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책임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내가 성취할 목적이 무엇이냐?” “내가 지켜야할 법이 무엇이냐?”라는 물음 보다는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책임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자신을 부응시켜 나갑니다.

우리교단의 과거를 되돌아보거나, 현실을 직시해 볼 때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이 등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언제나 소외되어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라는 과제를 소홀히 여겨온 것 같습니다. ‘나’만 있고 ‘우리’가 없는 현상을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저는 이번 104년차 총회에서 많이 보았기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만 했습니다. 성경은 비록 좋은 것일지라도 ‘나의 독선’을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개념이 결여되고 ‘나’를 강조할 때는 모든 것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독선에 빠지기 쉽고, ‘너’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너’를 우롱하는 거짓말도 예사로이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단이 진정 ‘강한 우리’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없는 것일까? 다시 ‘우리’가 되고 ‘강한 우리’가 되어야 하기에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습니다.

먼저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일화를 소개합니다. 춥고 배고픈 병사가 보초 근무 중 졸고 있는 것을 장군이 보았습니다. 군법에 의하면 그 병사에게 벌을 주어야 했으나, 장군은 오히려 자기가 입던 옷을 덮어주고 병사가 깰 동안 대신 보초를 섰다는 것입니다. 장군은 전쟁터에 나가면 늘 일선에서 싸웠습니다. 아랫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고 그들과 고락을 함께 나눈 희생적인 장군 앞에, 모든 병사들은 신바람을 내어 싸웠습니다.

서울에서는 지도층과 백성이 남이 되어 버렸으나, 남녘의 해전에서는 이순신과 수병, 그리고 백성들이 ‘우리’가 되어 왜군을 당당히 물리쳤던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성결교인으로서 복음의 동질성을 갖고 있기에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기쁨을 충만케 하는 예수님의 마음만 가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진실만이 ‘강한 우리’를 만들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 12:19)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만이 막힌 ‘너’와 ‘나’의 담을 허물 수 있고 성결인들의 힘을 응집시킬 수 있는 호소력을 지니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과 그 말씀을 분명하게 전달 할 수 있는 지도자는 우리 교단에 많으나, 그 가르침대로 자신이 살고 성도들의 모범이 되는 지도자는 그렇게 많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요인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우리 교단은 기둥같이 요긴한 다음 지도자를 훈련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제언해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단이 어떤 모습을 갖추며 교회 본연의 사명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가는 거의 전적으로 지금 우리가 어떤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고 훈련시키느냐, 그리고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얼마나 존경하고 신뢰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사회가 발전되어도 교회는 계속 지도자에 의존할 것이며, 그 의존의 정도도 근본적으로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결교단은 미래의 지도자 양성이나 훈련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많이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것임을 마음 깊은 곳에 오래 새기면서 ‘강한 우리’의 열망을 키워 나가는 성결인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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