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서의 목회

김하석 목사는 1929년 3월 3일 밀양지방 감리목사대리 겸 밀양교회 주임으로 파송되었다. 당시 밀양지방은 밀양, 초동, 범평, 봉림, 통영, 진주, 동래, 부산, 삼천포 등 9개 교회로 조직되어 있었다.

김하석 목사의 주재지는 밀양으로 정해졌고 그는 윤순단 전도사와 함께 밀양교회를 목회하며 경상남도 일원을 감리하며 돌보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삼랑진과 김해에 성결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순회지로 지정하고 그 두 지역을 자주 순회하였다.

1929년 김하석 목사가 목회하던 밀양교회는 밀양 일대에 성령의 큰 부흥의 역사가 임하기를 기대하며 수개월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먼저 신유의 권능이 나타나 사귀병자 김창윤의 가족 전체가 치유되어 주께 돌아왔다. 한 자매는 성경과 찬송가를 찢어버리는 등 핍박하는 남편을 위해 특별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아 그 남편이 주께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먼 곳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아들까지도 믿게 되었다. 온 가족이 구원 얻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형제는 기도의 열정이 뜨겁게 일어나 깊은 산중 바위굴 속에서 기도하다가 경찰서에 구류까지 당했으나 그는 이를 개의치 않고 더욱 신앙을 굳게 다져나갔다.

밀양의 보통학교 훈도(선생)와 금융조합소의 서기 등 지역의 엘리트 유지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출석하여 믿게 되고 또한 그들이 그의 동료 지성인들에게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하였다.

밀양교회는 매주 월요일에는 소아집회를 열고 주일학생들의 심령을 인도하여 주일학교를 부흥시켜 나갔다. 이렇게 밀양교회가 전심전력으로 기도하고 전도하여 교회를 질적 양적으로 부흥시켜나가고 어린이 전도와 양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밀양 일대에 큰 부흥을 가져왔다. 당시 밀양교회의 교세가 신도총수 142명이었고 재정적으로 자급을 하는 교회였다.

밀양교회의 부흥성장에는 김하석 목사의 열심과 부흥을 기대하며 기도에 매진한 성도들의 헌신이 밑거름이 되었다.

김하석 목사는 1929년 9월 하순부터 질병으로 인해 약 2개월 동안 휴양한다고 활천 소식란에 게재되었다. 또한 김하석 목사는 1931년 3월 18일에 개회된 제3회 성결교회 연회에 33인의 정회원으로 등록되었으나 휴양 중인 대의원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1932년 3월 23일에 개회된 제4회 성결교회에도 휴양 중인 정회원으로 등록이 되어 있었으며 역시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순교했다는 1939년까지 그에 대한 7년간의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필경 김하석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마다 일본경찰이 집요하게 감시, 압수수색, 구금, 고문을 가해 그의 행방을 알리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하석 목사는 1939년 대구의 보인산에서 순교할 때까지 신앙의 지조와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의 삶을 산 성직자이며 애국열사로서 험난한 가시밭 인생의 여정을 살았음이 미루어 짐작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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