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신앙인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을 보고 비아냥대던 말이 있다. “예수쟁이 치고 말 못하는 놈 못봤다.” 부흥사들이 교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즐겨 사용하던 은유가 있다. “천당에 가서 보니까 입만 동동 떠 다니더라.” ‘촌천살인’이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피가 튀고 뼈가 으깨어지기를 목표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모습은 아무리 열 걸음 스무 걸음을 물러서서 보아도 목사와 장로들의 성총회장은 아니었다.

▨…‘말로 온 동리를 다 겪는다’,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말도 있음은 일부러 외면하는 것일까. 아니면 성총회나 성결교회가 눈꼽만큼도 성결하지 못하므로 그대로 둘 수는 없다는 혁명정신의 탱천을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탓이었을까.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난장판은 아니었다고 자위하려는데 어느 대의원이 내뱉었다. “다시는 총회에 오지 말아야지.”

▨… 말 많은 세상을 혐오한 윤기(1741~1826)는 이런 글을 남겼다. “부득불 말하려면 생각하고절제하라. 그밖에 온갖 일은 입다물고 혀를 묶자. …큰 말은 안 뱉으면 큰 무너짐 면케되고 작은 말도 내게되면 작은 실패 있게 되네. 말은 하면 안 되는 법, 작든 크든 상관없네. 작은데서부터 지켜 큰 허물이 없게 하리.”(한글역·정민)

▨…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남의 눈의 티를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 주셨지만 그 보다 먼저 자신의 눈의 들보부터 보도록 지어 주셨다. 우리의 하나님의 형상 속에는 자신의 모순과 오류를 인식할 수 있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인공지능 연구의 선구자인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도 “자신을 생각할 힘이 없는 정신은 그 어떤 힘도 가질 수 없다”라고 단언하였다.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말씀을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규정한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난도질이 마구잡이로 행해지는 교단의 풍토를 개탄할 틈도 없이 그 칼춤의 섬광이 총회장을 덮쳤다. “우리들은 모두 타인의 불행을 예사롭게 보고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라 로슈푸코의 비꼼이 인간의 잔인함이 되어 그 말들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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