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사님이 입원하여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전주의 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후두암 진단을 받은 집사님은 이미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입에 넣어주는 물 한 숟가락도 그냥 주르륵 흘러나올 뿐이었습니다.
6.25 전쟁에 참전하여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군번도 부여받지 못한 채 소속부대원 전원이 사망하여 보훈대상에서도 제외되어 평생을 저는 다리로 수레를 끌며 연탄 배달로 생계를 유지하던 분입니다. 그나마도 연탄이 팔리지 않는 여름에는 부인이 부안과 전주 등지로 나가 파출부 일을 하여 먹고 살 았습니다. 그래도 변함없이 주일을 잘 지키고 새벽마다 피곤한 몸을 추스려 기도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짧으면 보름 길게 잡아야 두 달 정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서울에 사는 두 아들이 내려와 “어머니가 아버지 돌보지 않고 돌아다녀서 이 모양이 된 것 아닙니까?”하고 원망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 집사님이 가슴을 치며 나에게 하소연 하였습니다. “목사님! 남편의 병 때문에 슬프고 마음 아픈 것 뿐 아니라 자식들의 말에 억울하고 분합니다.”
갑자기 내 가슴 속에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랑, 연민, 서글픔 등 한 단어로는 정의할 수없는 단단한 감정의 응어리를 가지고 남편 집사님을 끌어안았습니다. 축 늘어진 몸에 앙상한 갈비뼈만 느껴지는 그 분을 안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몸부림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억울합니다. 이분을 이렇게 보낼 수 없습니다. 자식들의 원망을 들으며 남은 평생을 보내야 할 부인 생각도 해 주세요. 한번만 다시 일어나 교회로 오게 해주세요.” 말이 기도지, 순 오기로 생떼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로부터 1달 쯤 지난 어느 날, 부인 집사님에게서 “목사님, 우리 남편이 퇴원해 집에 왔어요.”하는 전화에 장례식장도 없던 그 시절 병원에서는 임종을 앞두고는 대부분 집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이기에 황급히 임종예배 준비를 하고 달려갔습니다. 불도 켜 놓지 않은 굴 속 같은 방에 집사님이 아랫목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한 숟가락의 물도 넘길 수 없던 분이 혼자 일어나 앉아서 밥공기를 들고 깍두기까지 먹는 것을 보며 잠시 정신이 멍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물어보니 지난 주간부터 갑자기 통증이 사라져 밥도 먹게 되어 의사들이 다시 정밀검사를 해보니 후두암 종양과 증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며 퇴원지시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 후 길을 가다가 전원 몰사한 줄 알았던 당시 부대의 소대장이었습니다.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쓰러진 소대장을 그 집사님이 총알이 빗발치는 속에 들쳐 업고 나와 후송시켰는데 그 분은 치료를 받고 다시 복귀하여 장군으로 진급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군대에 근거가 남아 있지 않는 집사님을 찾을 길이 없어 40여년을 안타까워하였다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분의 앨범에 우리 집사님과 전투지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고 예비역 장성인 그 분의 증언으로 집사님은 보훈 대상자로 지정이 되어 연탄배달 수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연금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절던 다리도 보훈 병원에서 수술 받아 고쳤고, 이듬해 6.25 기념일엔 무공훈장도 받았습니다.
기도하고 바라는 것보다 더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께 오직 “감사합니다. 은혜입니다”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신이 났고 목회는 신(神)나게 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의사의 치료(治療)는 ‘병’을 고쳐 주지만, 하나님(神)이 낫게(愈) 하시는 은혜는 병과, 사람의 가치, 다른 이와의 관계, 살림살이까지 ‘다’ 고쳐 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