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저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데모를 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위 편지는 1960년 4. 19혁명이 한창이던 때 당시 한성여중을 다니던 2년 진영숙 씨가 어머니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이 어린소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님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자유를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 날, 거리를 누비던 그 함성은 무엇을 위해 있었던 것일까? 미완의 혁명이라는 구구한 평가가 내려지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자유가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과,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지키고 획득해야 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고 싶다면 그는 싸워야 한다. 이것은 모든 자유의 역사가 보여주는 삶의 진실이다.하지만 자유는 사실 그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인간 행동을 요구한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에 대한 진지한 숙고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과연 무엇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무엇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먼저 자신의 소중한 자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가정, 자신이 속한 공동체, 그리고 더 나아가 인류 모두를 지켜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그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때 그가 쟁취해야 할 자유가 참된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상대로 해서 싸워야 할 것인가?

이 대답을 하기 이전에 인간이 거짓된 것들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의 행복을, 참된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파렴치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 거짓 속에는 자유가 바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근세적 이념도 들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자유에 대한 권리가 로마의 사유재산이라는 법적 권리로, 그리고 중세이후 근세의 여명에는 재산의 소유권에 대한 논란에서 성장해 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현대인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 그리고 자유의 역사가 발견한 가장 고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장조차, 자유가 자신의 고유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생각조차,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을 기점으로 성장해 오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좀 다른 차원의 분석이 요구된다는 것을 전제로 근자에 저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주장, “인간은 자유로 선고받았다”는 바로 이 점을 명백하게 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자유의 운명적인 어두움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다. 사르트르는 놓쳤지만 자유는 타인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으로 우리는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통찰을 검토해야 한다. 그가 자유를 필연성과 연관시켜 해석하였을 때 그 필연성이란 인간이 자신을 성취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유의 길이 이미 우주적 존재목적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짧막한 살핌으로 인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조건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인간이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말잔치로 끝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자기를 기만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그리고 그 객관화된 모든 어두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주어진다. 자유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사명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마라”(갈 5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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