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가는 길이 구부러지거나 가로막는 물체가 없는 평지를 지날 때에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거스르는 것이 있어야만 소리가 납니다.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로 뜻을 전달하거나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 할 수 있는 것은 폐에서 기도(氣道)를 통해 나오는 호흡을 막아 거스르는 이(齒)와 입술이 있어 조절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내 쉬는 숨이 이런 조절을 거치지 않고 그냥 터져 나오면 비명 아니면 한숨일 뿐입니다. 어린 아기가 숨을 내 쉬면서 뜻을 알 수 없는 옹알이를 하다가 자기의 뜻으로 조절할 수 있어 “엄마”하고 말하는 최초의 발화(發話))는 4만 번의 연습 끝에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관악기는 연주자의 입술로 불어주는 바람이 그냥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이나 떨판이 막고 그 숨결을 거슬러 떨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리가 납니다. 바람은 늘 움직이고 있지만 거스르는 실체가 있어야만 소리로 들립니다. 여름에는 대숲이 있고 솔가지가 있어 시원한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가 있어 스치는 바람에 가냘픈 소리가 음악처럼 들립니다. 물이 흐르는 소리에도 같은 원리가 있습니다. 개울을 흐르는 물도 조약돌을 만나고 구부러지는 여울을 만나 다정스런 소리를 들려줍니다. 폭포에서 떨어지고 큰 바위를 만나 부딪쳐 깨어지면서 장엄한 오케스트라와 같은 소리를 냅니다.

“사랑하다가 죽기를”원한다는 시인 정호승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 상처 많은 꽃잎들이 / 가장 향기롭다(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비 오는 날에는 / 빗방울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 눈 오는 날에는 / 눈송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 / 눈비 그치면 / 햇살에도 상처가 있습니다(상처). 상처는 스승이다 / 너의 뿌리가 되기 위하여 / 예수의 못자국은 보이지 않으나 / 오늘도 상처에서 흐른 피가 / 뿌리를 적신다(상처는 스승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 대하여 “바람이 임의로 불어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소리는 듣는다”라고 하셨습니다(요3:8). 소리를 듣고 바람의 실체를 아는 것처럼 그 사람의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말, 행실, 삶의 결과가 그의 거듭남과 성령 충만한 삶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스승을 잃고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빌어주신 뒤 십자가에서 받으신 상처를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사죄의 능력을 행사하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19~23). 용서는, 제자의 덕목이나 인격의 표현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성령의 세례와 충만함은 사랑으로 가늠할 수 있으며 사랑은 용서로 그 결과는 평강 즉 화목한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목격한 자,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용서하지 못할 죄와 상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유를 모를 역경, 의인을 모함하는 배신 등, 고난의 여울을 지날 때 그 사람의 인격과 영성에서 우러나오는 참 소리가 들립니다. 불평, 원망, 비난, 탄식, 절망의 소리 아니면 감사, 기도, 희망, 용서, 사랑의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꽃의 상처에서 향기가 풍기고, 악기에서 떨판이 흔들려 음악이 흐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역경을 만날 때 참된 신앙과 사랑의 노래가 향기처럼 흐를 것입니다.

고난은 바람 같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아름다운 음악을 선사하는 기회입니다. 용서함으로 사랑하는 이, 성령으로 충만한 참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이름 ‘성결’(聖潔)로 교회의 이름을 삼은 신앙의 선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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