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대한민국은 침몰한 초계함정 772함(천안함) 때문에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 인터넷 블로그에 등장한 장문의 기도문은 우리의 애절한 심정을 여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 그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가기 전에 귀대하라”로 시작하는 이 기도문은 바다 속으로 스러져 간 이들을 향한 심정을 구구절절하게 쏟아내고 있다. 침몰된 함미에 남아있을 46명의 이름을 일일이 높이 외치며 “대한민국을 보우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772함 수병을 구원하소서…”라며 절망속의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살아서 돌아오라는 외침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그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리라. 먼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들, 수수께끼 같은 많은 난제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렇지 않고는 하루라도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지탱하기 어려운, 그러한 삶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로 한 기독교인의 기도문이 종교와 세대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소망을 찾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함께 표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도문은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오히려 그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그래서 인간을 향한 존엄성을 빛나게 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안타까운 현실의 장에서,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순간, 과연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찾아지는 것일까? 모두 울고 있는데, 모두가 상실의 슬픔가운데 있는데,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가운데서 놓을 수 없는 끈을 발견하는 것일까? 그들이 보이지 않았던 무엇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렇게 사라지고 없어지고 빼앗겨 버렸는데도 오히려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저기 차가운 바다 밑에 누워있던 수병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니다. 창졸간의 벌어진 재난 속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오로지 아픔만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강요된 죽음의 순간, 삶의 마지막 앞에서 그들과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그 존엄성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명백하게 인식하려고 할 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친다. 그들의 마지막을 국가 유공자로 포상하는 국가적 행사를 벌인다고 해서, 그들의 영면을 추모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종교의식을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다 설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천안함 사태는 여러 가지를 시사하지만 그 가운데도 우리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깜깜한 동굴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보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밝은 낮에서도 부끄러운 이탈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 안에, 인간의 내장 속에 들어있는 어떤 형질이 인간을 규정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 초월적 존재이기도 한 것 같지만 동시에 동물적 본성에 사로잡혀 있는 일상성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습일 뿐, 그것이 인간이 누구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이중성을 가진 채로 인간은 여전히 그 이상의 존재이다.
죽음 앞에서, 지금까지의 삶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깨우치는 하늘,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초월성이 아닌, 저기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에 노출된 존재임을 어렴풋하게 깨닫게 된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자들이며 그렇게 해야만 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안함의 승조원들과 모든 유족들 한분 한분에게 은총을 주시기를 기대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