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0:9~12)

지난주에 생각해 보았듯이, 바울은 드로아에서 일종의 철야부흥회를 하게 됐었다. 그런데 그 은혜스러운 장소에서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에서 졸면서 말씀을 듣다가 떨어져 죽었다.
결론적으로 유두고는 살아났다. 그리고 그 살아난 청년 때문에 난리 법석을 떨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그때 위로 받은 것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드로아 사람들은 큰 핍박과 환란을 당할 때마다 ‘두고~~ 두고~~’ ‘유두고’가 살아난 것을 생각하며 부활신앙으로 모든 환란을 이겨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 생각해보면 바울은 염치도 없다. 도대체 이걸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 봐야 될지, 주책 중 주책이라고 봐야 될지 모르겠다. 그렇게 밤늦도록 설교를 길게 하다 사람 졸리게 해서 떨어져 죽게 했으면 ‘내 설교가 좀 길었나?’ 미안해하면서 그만 마무리해도 될 법도 한데, 이번엔 한술 더 뜬다.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행 20:11)’
이번엔 아예 야참까지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 하다가 떠났다는 거다. 바울은 정말 한번 말씀 전했다하면 뭐 남들 사정, 눈치 보지 않고 진이 다 빠지도록 말씀으로 심령 속에 꽉 채워놓으려고 작정한 사람같다. 아예 제자 삼기로 작정해서 완전히 말씀으로 사람을 지져놓고 만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의 바울의 모습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데 바울은 어디서 이런 이상한 행동을 배우게 된 것일까? 바로 그의 롤모델이셨던 예수님께 배운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어떠셨나? 특별히 우리는 주님의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지낸지 얼마 안됐다. 주님은 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함이었다. 구원하시되 자신의 몸을 완전히 십자가에 내동댕이치셨다. 살은 채찍에 맞아 너덜너덜 다 찢어져 허연 뼈가 드러나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속살이 터져 나오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시시기로 작정하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열정이 바울에게 각인되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은 맞벌이다, 주5일제다 해서 주일날 쇼핑도 해야 하고, 나들이도 가야하고, 또 피곤하고해서 주일 저녁예배나, 철야예배가 없어진지 오래됐다. 20분 설교도 길다고 간단히 10분 말씀을 전하고 오히려 편집한 영화나 동영상, 간증이나 찬양으로 대신해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는 감성을 터치하는 예배를 드려야 은혜로운 설교를 했다고 여기는 때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복음전파의 열정을 회복하자. ‘사람을 죽여 놓고도 또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또다시 복음을 얘기 하는 바울의 담대한 열정을 말이다. 우리도 바울처럼 가슴속에 절절 끓어 넘치는 주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고,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말씀으로 굳건히 세워나가는 말씀의 능력자가 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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