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목사를 기억하며

우리 한국성결인의 큰 스승이신 이명직 목사님!

1973년 3월 30일 목사님께서 소천하신지 어느덧 37주기를 맞았습니다. 목사님은 1890년 12월 2일 양주군, 지금의 서울 종암동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역사는 근본적으로 인물사라고 합니다. 목사님은 비교파적 전도를 위해 설립된 복음전도관을 성결교회라는 교파교회로 형성한 후, 사중교리를 체험적인 신학으로 승화하여 성결교회를 한국의 삼대교단으로 성장 발전시켜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셨습니다.

목사님은 성결교회 초기의 부흥과 1930년대의 교단의 갈등, 일제말의 고뇌, 해방이후의 재건, 1960년대 분열, 70년대 합동 등 한국성결교회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성서학원의 교수가 되신 1916년부터 1972년 서울신학대학교 명예학장으로 소천 하실 때까지 50년이 넘게 수많은 교역자들을 배출하신 한국성결교회의 큰 스승님이십니다. 오랫동안 이사장과 총회장 등 성결교단의 대표자였고, 신학교육의 최고책임자였으며, 수많은 저서와 교단 기관지 ‘활천’의 주필로서 교단을 이끄신 명실 공히 성결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목사님은 복음주의 신학을 이끌어 오신 지도자였고, 세속주의에 대항하여 성결을 외치셨습니다. 이단사설에 대항하여 진리보수를 주장하셨고, 고등비평에 대해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셨으며,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해오셨습니다. 또한 1960년대 예성교단이 시작될 때 성결신학교의 명예학장을 맡으신  예성의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목사님은 또한 인격적 삶의 실천을 통해 성결의 향기를 내뿜는 ‘성결인 중의 성결인’이셨습니다.

우리 한국성결인의 큰 스승 이명직 목사님!
목사님은 성결교회 대표자로서 일본의 종교정책에 반대하여 일본종교정책에 지대한 장애를 입혔고 구약성경을 말살시키고 중요한 찬송가 가사를 삭제하려는 일제의 획책에 맞서 이를 저지시켰으며, 재림신앙의 고취 등으로 온갖 고문과 박해 투옥을 당하시고 급기야 교단이 해산되는 일제의 피해자임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에게 친일인사라는 편향된 역사의 낙인을 찍어, 목사님과 우리 성결교회를 욕되게 하고 후손들에게 망신을 주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의 안하무인격이고 몽매함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손에 의탁하거니와 우리는 이를 바로 잡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렵니다.

한국성결인의 큰 스승 이명직 목사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추앙합니다. 목사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업을 굳게 잡고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을 온 누리에 확산시켜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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