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3:1)
몇 해 전, 남아공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신문의 기사로 접하던 모습들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신학생 시절 함께했던 동기를 만나 여행길에 동행했다. 지난 이야기들의 재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대화의 국면 전환을 위해 나와 친구는 한국 교계를 걱정하는 거물이 되어 있었다.
그 때 나누었던 대화중에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나는 목회의 현장에서 그리고 친구는 선교지에서 겪었던 일들을 나누면서 공통점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둘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역현장에서 생명을 걸고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다짐했다. 주님의 일과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살아보자고! 온 몸에 소름이 끼칠 만큼 결의에 차 있었다.
그런데 시간은 사람의 결심과 의지를 무디게 만드는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섬기고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주님의 일과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가? 부끄러웠다!
가장 장수하는 조류, 독수리는 약 70년의 수명을 누린다. 그런데 마흔이 된 독수리는 부리와 발톱이 무디어지고 날개가 무거워져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독수리는 매우 중요한 결단을 해야만 한다. ‘이대로 죽을 날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러운 변화의 과정을 수행할 것인가?’ 변화의 길을 선택한 용기있는 독수리는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 둥지를 튼다. 그리고 낡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씩 뽑아내고 새로 돋은 발톱으로 날개의 묵은 깃털도 하나씩 뽑아낸다.
이때의 고통은 죽음과 비교될만한 수준이다. 마지막에는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져 빠지게 한다. 그리고 새로운 부리와 발톱과 날개가 돋아나기를 기다린다. 그 기간이 약 6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마흔 살의 독수리는 이렇게 다시 태어나 힘차게 날아올라 30년 동안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사데 교회를 향해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책망하신다.(계 3:1) 사데 교회가 멸망한 이유는 취약한 부분 때문이 아니다. 삼면이 450m의 절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초를 잘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적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하여 절벽을 타고 올라와 사데 지방을 점령한 것이다. 가장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분, 익숙해져 습관으로 정착 되었던 부분들이 내 삶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A.W.토저는 “예배인가, 쇼인가”라는 책에서 바로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성령을 떠난 사데 교회는 과거에 대한 집착에 지배되었다는 것이다. 성령과의 교제에서 떠나면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전통에 집착하고 미래의 비전을 상실한다. 자기중심적이고 현실적인 가치 판단으로 미래를 새롭게 열어 가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고 육체의 안락함과 인간의 짧은 지식에 안주하여 결국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헨리 나우엔은 ‘훈련이란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공간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으로 가득 차 있다.(눅 8:14). 그 마음의 공간을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이 독수리의 새로운 30년을 향한 변화의 과정이 아닐까? 힘들 때일수록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더욱 확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뽑아버려야 할 묵은 발톱, 뭉툭해진 부리를 깨트리며, 너덜너덜한 깃털을 뽑아내고 새로운 30년의 삶을 향해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