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교사 생활

문기선(文夔善)은 조선 말기인 1896년 4월 2일에 서울 당주동에서 부친 문규복 씨의 8남매 중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부친은 구한말 고종황제의 시종무관 출신으로, 한성(서울) 경시청 총순과 강원도 경무관, 그리고 파주 군수를 역임한 전통 관료 가문을 잇는 종손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유교적 윤리와 국법준수에 솔선수범하는 양반의 엄한 규율이 몸에 자연스럽게 배면서 성장했다.

그는 타고난 수재로 3살 때부터 그의 천재성이 드러났는데 3살 때 천자문을 줄줄 암송했고, 6살 때는 어려운 한시(漢詩)까지 짓는 탁월함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양반들이 가금씩 여는 시회(詩會)에 천재소년으로 초청 받아서 그들이 낸 시 제목에 맞는 재능을 과시함으로 양반들이 놀라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7살이던 1903년에 그는 서울 매동소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한성보통학교와 한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수석으로 졸업, 19살에 서울의 소학교 훈도(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10년 한일합병으로 500년을 지탱해 온 나라를 잃게 되자, 민족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무지를 벗어나는 교육뿐임을 깨닫고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훈도가 된 것이다.

당시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를 세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장악하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래서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며, 힘을 기르기 위해서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조선의 양반들을 깨우쳐, 당시 소학교에는 장가가서 상투를 튼 2-30대의 양반자제들이 입학하여 공부했다.

19세 총각교사인 그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양반자제들에게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특히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조선보다 앞선 일본의 지식과 문물을 열심히 배우고 익혀 민족의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때 그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 중에는 해방 후에 대법관과 대법원장, 장관을 지낸 인사들이 몇 사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츰 교사직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일제는 소학교의 교과과정을 개편하여 한글과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그리고 여름 겨울방학 중에 조선인 교사들에게 의무적으로 일본어교육을 받게 한 후, 이를 가르치도록 했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한반도에는 일제의 병합을 반대하는 크고 작은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그럴 때마다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의병들이 체포되어 일경의 잔인한 고문에 의해 죽어갔다. 살아남은 자들도 변호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형을 언도받거나 몇 년 동안 고통스런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피식민지 백성으로 고통당하는 민족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오직 변호사임을 깨닫고 소학교의 훈도직에 사표를 내던지고, 개강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입학생 정원 30명 중 29명이 일본인이고, 문기선 만이 최고점수로 합격한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일본 당국은 조선을 법으로 통치하기 위해 일본인을 위한 법학전문학교를 세운 것인데, 탁월한 실력을 보인 조선인 문기선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 일제는 조선인을 법관으로 임명할 수 없는 정책을 폈다. 그러다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 몸임을 역설하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 시행과 함께 1922년에야 조선변호사 시험제도를 공포했다. 문기선은 이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 수석의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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