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두 가지 고민은 어떻게 하면 바른 설교와 들리는 설교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설교란 이 두 가지 고민이 해결된 설교이다.

바른 설교란 설교내용의 문제이다. 설교내용이란 설교가 무엇을 다루는가에 따라 다양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낙태, 환경보호, 인권, 통일 등 어떤 특수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 설교자는 그 주제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설교’와 달리 일반적인 ‘성경적 설교’라면 여기서의 바른 설교라는 의미는 일차적으로는 성경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했는가의 문제이다. 모든 설교자는 성경본문이 지니는 ‘보편적 객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근한 예로 고전 13장하면 ‘사랑’이 객관적 주제이고 고전 15장이 ‘부활’을 다루는 장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설교자가 이런 보편적 객관성을 무시한 채 고전 13장을 본문으로 ‘환경오염’에 관한 상황설교를 한다든지, 고전 15장을 ‘전쟁과 평화’의 설교로 끌고 간다면 이것은 본문과 회중에 대한 ‘배신’이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설교가 진리에서 벗어나 있고 주어진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왜곡했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가 아니다!

문제는, 그러면 바른 설교를 한다고 해서 그 설교가 ‘들리는 설교’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광의적으로 보자면,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설교는 다 바른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강해설교는 본문을 온전히 이해했다는 전제 하에, 바른 설교일 것이다.

그런데 한때 한국 강단을 휩쓸었던 강해설교가 회중을 사로잡는 설교가 되었던가? 설교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에 집중해서 설교함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회중이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던가? 회중이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반드시 설교가 바르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설교자는 거의 예외 없이 ‘지당한 설교’를 한다. 특히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는 내용적으로 바른 설교일 수 있다. 그럼에도 회중들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른 설교라 해서 자동으로 전달되는 설교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놀랍게도 바르지 않은 설교라도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용이 부실하고 때로 해석이 잘못된 설교라 해도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  설교라는 이름으로 비진리가 전해져도 그것이 회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은 수많은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사례에서 여실히 증명되어 왔지 않은가?

이 원리는 우리 일상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사기꾼이 하는 말이란 내용적으로 보면 ‘거짓’이지만 그 거짓말이 수많은 사람을 매료시킨다. 마음을 움직이고 의지를 움직이고 그리고 지갑을 움직이게 한다. 따라서 설교의 내용이 올바라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설교자의 의무이지만 올바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회중을 사로잡고 회중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산이다.

전달되는 설교는 그것만의 훈련과 노력을 따로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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