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대회 강의안 전문-3

-코이노니아(KOINONIA)영성
마침 BCM 교육이 그 바탕을 코이노니아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저는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영성을 이야기 할 때 코이노니아의 영성은 대단히 중요하고 기독교 교육은 코이노니아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이노니아 영성이 무엇인지 이해하여 보도록 합니다.
어느 날 훈련이 끝나고 마무리하려고 조교를 포함한 스텝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1조 조교가 아직 모임에 오지 않았습니다.
“1조 조교님은 왜 아니 오시죠?”
“조원들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
우리는 잠시 기다렸습니다. 잠시가 아니라 꽤 오래 기다렸습니다. 1조 조교가 들어왔습니다. “1조에서는 무슨 특별한 기도가 있었나 보죠?”
“속초에서 오시는 전목사님을 위하여 특별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전 목사님을 어쩌라고요?”
“어제 오후 쉬는 시간에 축구 하다가 발이 다쳐서 병원에 가 깁스를 하고 왔지 않아요?”
“그랬지요.”
“훈련원에 있는 동안은 목발 집고서라도 강의실 오가며 훈련을 잘 했습니다만 속초까지 운전해 가야 하는데 이 일이 난감한 거예요. 누가 대신 속초까지 운전해 주어야 하든지 아니면 본인의 발이 나아서 스스로 운전해 가든지 해야 할 것 아니겠어요?”
“그렇겠네요. 그래서요?”
“ ‘우리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면 전 목사님 스스로 운전해 가면 되지 않겠는가? 우리 합심하여 사랑의 중보기도를 합시다.’조원 중에 한 분이 그렇게 말하자 모두 ‘그럽시다.’하고는 둘러서 공동 안수하며 한 20분 기도하였지요.”
“어린아이 같은, 그러나 대단한 믿음과 사랑의 행동이었군요. 그래 어찌 되었나요?”
“기도 끝나자 깁스 풀고 운전하고 갔습니다.”
함께 모였던 스텝들은 모두 할렐루야를 외치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 거룩하고 권위가 바위같이 무거운 목사들이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실행한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리고 서로 경쟁관계로 마음의 벽을 쌓고 살던 목사들이 자기 조의 지체들의 문제를 자기 문제처럼 여기며 자연스럽게 공동으로 짊어지고 사랑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것이 코이노니아의 경험의 일부라고 믿습니다.
코이노니아란 사귐, 교제, 친교 등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입니다. 앞으로 논하면서 더욱 깊이 이해가 되겠지만 코이노니아는 교제요 친교인데 단순한 교제 이상의 교제요 친교 이상의 친교 입니다. 하나로 연합된 공동체를 이루는 교제와 친교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이 코이노니아 속에서 가장 행복하고 교회는 이 코이노니아 속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한 교회 성장의 원리의 제일 원리는 코이노니아 원리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학생들이 가장 감격스럽게 모여 오고 친구를 데려오는 일은 코이노니아 경험이 일어날 때입니다.
1, 코이노니아/인생의 본질적 삶의 방식
남난희씨가 쓴 “하얀 능선에 서면”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 덮인 겨울에 부산 금정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태백산맥을 따라 70여 일에 걸쳐 홀로 단독 종주를 한 수기입니다. 거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70여일 홀로 눈 덮인 산맥을 걸어가면서 지치고 몸살하고 동상 걸리고 하는 고통이 있었지만 가장 큰 고통은 고독, 홀로 있는 외로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해가 저물어 잠자리를 준비하려 텐트를 쳐놓고 하는 일이 눈을 담아 끓여서 물을 만들고 그 물을 눈 위에 뿌려 눈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들고 그 눈사람과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입니다. 칼 바람 부는 산 능선에서 눈 사람을 만들만한 낭만적인 형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래 봐야 독백이지만 너무 외로우니 그렇게라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내려가면 절대 혼자 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는 내용이 나오지요. 홀로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인생인데 그것이 왜 그런지 아십니까?
1) 그분의 형상, “우리” 이미지
성경에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계시가 있습니다. 그 어떤 철학도 어떤 과학도 알지 못한 성경만이 가르쳐 주는 인간에 대한 진리가 이렇게 말해 줍니다.
창 1:26~28
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 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성경적 인간관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으로 정리 됩니다.
하나님의 작품
첫째는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입니다. 요즘 세계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두 이론이 인간의 기원을 설명하는 논거로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는 진화론을 더 많이 믿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의 가치나 의미나 진정한 인간다움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창조론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치와 의미와 참된 행복과 기쁨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은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여기서 길게 논할 성질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분의 형상
둘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기에 하나님만큼의 가치가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미가 있고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 감격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 형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도 여러 가지로 논의 되고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 신격, 다시 말하여 영성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이신 하나님과 친교하고 대화하며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화의 상대로 하나님의 친교의 대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온전한 삶을 이루게 지어진 존재 입니다. 영혼을 지닌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신격 즉 하나님의 영성을 지닌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communication) 친교 하는(koinonia) 영성적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과 하나된 친교 속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없는 인생은 근본적으로 고독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고 가장 건강하고 가장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이미지
세 번째로 깊이 묵상하며 발견하는 진리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우리”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 온전히 하나를 이룬 일체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셋인데 하나인 하나님 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온전한 코이노니아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즉 삼 위의 하나님이 서로 온전한 하나된 친교 속에 존재하시는 절대적이고 온전히 하나된 하나님 입니다. 곧 코이노니아 하나님 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시지만 하나이신 하나님입니다. 이는 절대적이고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단순한 영성이 아니고 이 코이노니아의 속성을 포함하는 영성으로 지은 바 된 것입니다. 이전 다른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는 나오지 않던 말이 인간을 창조할 때 나와서 세 차례나 강조 되고 있는 “우리”라는 말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닮고 있다고 봅니다. 사람을 창조 하실 때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내 형상으로 만들겠다”가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하고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상의하고 동의 하시고 일치된 뜻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삼위일체 하나님이 강조되고 인간을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는 것이 강조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질 때 단순한 영성만이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 형상 즉 하나님 안에 삼위가 하나된 친교로 존재하는 그 코이노니아, “우리” 이미지로 만들었다는 것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개인으로 홀로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 서로간에도 하나되는 친교를 이루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된 친교 속에 살도록 지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동시에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들이 서로 간에도 하나를 이루고 경험하며 친교 하는 코이노니아 인성을 같게 하심으로써 최초의 인간 관계인 부부관계는 그야말로 하나 되어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 창조에서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음이 강조되고 2장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창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둘이지만 한 몸을 이루어 하나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부부요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경험입니다. 부부의 경우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하나 되는 코이노니아 경험 속에 사랑하며 연합하는 삶을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 섭리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코이노니아 인성을 갖고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정을 이루고 살게 하신 것이 코이노니아 인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연합, 인간 간에도 코이노니아 연합을 이루며 살아야 온전한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성부 성자 성령, 3위 일체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존재합니다. 이 “우리” 이미지로 지음 받은 인간도 3위 일체적 코이노니아 속에 살아가게 하신 것인데 인간의 코이노니아 3위 일체는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3개체 이상의 영적 인격이 만나며 하나된 친교를 누리는 삶에서 완성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된 연합과 서로간에도 하나된 친교 가운데 살아가는 코이노니아의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온전하고 내적으로 외적으로 건강하고행복한 것은 이 하나님과의 친교와 서로간의 하나된 친교 속에 살아갈 때 입니다.
2) 파괴된 영성 무너진 코이노니아
인간의 타락이야기를 통하여 이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마귀가 파괴하려 한 것이 이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요 동시에 인간 서로간의 코이노니아 즉 하나님의 형상, 우리 이미지를 파괴하려 한 것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은 이 하나님과의 연합된 코이노니아를 파괴하려는 것이요 인간 서로간의 하나된 친교를 파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인류 최초의 비극인 타락 이야기는 이 코이노니아가 파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파괴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시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뱀의 유혹은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뱀의 말을 믿음으로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불신은 사랑으로 하나되는 연합, 즉 코이노니아를 파괴하는 결정적인 독소입니다. 불신은 친교를 파괴합니다. 불신은 연합을 파괴합니다. 불신은 코이노니아를 파괴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이 깨어졌습니다. 성경은 파괴된 하나님과의 친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은지라
사랑의 관계, 연합된 관계, 코이노니아 관계에 있을 때라면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즐겁고 감격스러운 일이겠는데 이제는 두려움이 되고 피하여야 하는 비극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하나된 친교가 파괴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선악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질문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은 중고등 학생들에게 선악과 이야기를 하며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설교 도중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될 것이란 사실을 하나님은 미리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모르셨겠지.” 하고 대답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신 모양이네요.”라고 말 할 것이고 “아셨겠지” 라고 대답하면 “하나님은 따먹을 걸 뻔히 아시면서 먹으면 죽는 열매를 왜 만들어 놓으신단 말입니까? 참 괴팍한 하나님이네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그 열매 속에 독이 들어 있어서 먹으면 쾍 쓰러지는 그런 열매가 아닙니다.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먹자 마자 몸을 뒤틀며 쓰러진 것이 아닙니다. 독은 없습니다. 그것은 계명의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죽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면 코이노니아가 깨어지고 영적 죽음이 오고 영이 죽은 채로 영생하는 것이 오히려 저주가 되므로 육의 죽음도 선포된 것입니다. 문제는 불신이 코이노니아를 파괴하여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인간간 코이노니아 파괴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가 파괴되자 인간관계도 파괴 됩니다. 한 몸이었던 아담과 하와 사이도 파괴되었습니다. 처음 타락 이전에 아담은 하와를 보고 감격스럽게 외쳤습니다.
창 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하나된 연합의 기쁨이요 감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문자적 서술이기보다는 시적 감탄이라고 생각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하며 하나됨을 감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중고등학생들에게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떤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아담은 어떻게 그렇게 한번도 데이트도 안 해보고 하와를 보자마자 감격하여 끌어 안게 되었을까요?”
내가 잠시 대답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질문한 학생 옆에 있던 학생이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하는 말이 “야 바보야 그 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겠니?”
학생 말마따나 선택의 여지 없이 감격 하기도 했겠습니다만 하나님이 부부관계를 이루고 이 코이노니아 속에 살도록 창조하셨는데 홀로 있는 외로움을 느끼다가 코이노니아의 상대가 있게 된 그 감격과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이 파괴되면서 인간의 본질인 “우리” 이미지가 파괴되므로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서의 연합과 코이노니아도 파괴 되고 맙니다. 아담은 타락 후 이렇게 말합니다.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가 아닌 “여자 그가”로 전락시킵니다. 3인칭 즉 제 삼자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된 감격은 무너지고 삼자로 전락시키는 비열함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후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보면 가인이 질투와 시기로 아우인 아벨을 쳐 죽이는 사건 등은 타락이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하나된 친교가 무너지고 인간 서로 간의 하나된 친교가 파괴되는 것이 타락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2, 코이노니아/교회의 본질적 존재방식
원래 인간의 삶의 방식이 코이노니아였는데 마귀는 이 코이노니아를 파괴하는 전략을 썼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인간이 이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고 회복하려고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이제는 인간을 회복하고 타락한 중에도 원래의 코이노니아 즉 하나님과의 친교와 서로간의 친교를 아는 새로운 인간의 삶을 위하여 공동체적 인간을 짓고자 하셨습니다. 이 코이노니아 공동체로 세운 것이 교회 공동체 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란 이 코이노니아를 회복하는 공동체요 코이노니아가 교회의 본질적 존재방식이 되었습니다.
1)예수님이 회복하려 한 코이노니아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려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파괴된 코이노니아를 회복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편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한 십자가요, 인간 서로간의 장벽을 허무는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진리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본성인 코이노니아 영성,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신 중보기도의 내용을 보면 바로 이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회복하시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요 17:21~24
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은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마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는 것 같이 하나되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되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창조 시에 하나님이 만든 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우리 이미지가 회복된 그러한 제자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파괴된 코이노니아를 회복하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구원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데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회복한 공동체로 교회를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하사”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고” 주님은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도 온전히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제자들이 공동체로서 하나되어 서로간에도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회복한 공동체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되고 서로간에 하나된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룰 때 세상은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공동체 즉 온전히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가 교회이며 주님께서 세우시기를 원하신 본질적 교회라는 것입니다.
2)회복된 코이노니아 영성
좀 더 이 성경의 진리를 살펴 보기로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코이노니아가 회복된 새 인간을 지으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과 화해의 역사를 이루셨다고 증거 합니다.
엡 2:14~19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성경은 교회의 본질적 속성을 분명히 코이노니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여기 에베소서에서도 이 사실은 강조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본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유대인도 이방인도 예수 안에서 하나되게 하사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만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할 때 둘이 하나되어 하나님과 하나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가 교회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하여 회복된 새 인간상을 지으시려는 것입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로 따로 개인주의에 모래알처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둘이 하나 되어 살아가는 새 사람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과 친교 하는 인간, 그리고 서로가 친교하며 하나되어 살아가는 코이노니아 영성과 인성이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져 불신으로 타락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 되고 사람 상호간에도 이기주의로 분리되는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게 될 뿐 아니라 사람 사람이 하나되는 진정한 연합의 코이노니아적 새 인간을 지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교회는 바로 새 인간상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또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둘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하나님과도 하나되는그러한인간의삶을회복하고자하는것이하나님의뜻입니다. 그리하여 모래알처럼 따로 사는 외로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서로의 사랑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온전한 인생으로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회복된 코이노니아 공동체가 교회 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코이노니아가 회복된 인생을 누리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3)코이노니아 공동체로의 초대
요한 사도는 전도의 목적이 이 코이노니아를 이루려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요일 1: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기독교의 영성은 코이노니아 영성입니다. 요한일서의 말씀에 보면 요한 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 전하는 목적을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귐이 코이노니아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우리라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들어와 그 공동체와 그들도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것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코이노니아 공동체의 지체가 되어 코이노니아 인성, 코이노니아 영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귐은 인간들만의 사귐이 아니라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되는 코이노니아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 사람간의 코이노니아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 코이노니아가 회복된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그러므로 코이노니아 영성입니다.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공동체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고 이 코이노니아를 이룰 때 우리의 영성이 온전하고 건강하며 충만한 것입니다. 이 사귐은 우리가 하나되는 사귐이요 하나님과 하나되는 사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영성이 창조시의 영성으로 온전히 회복 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의 과제는 이 코이노니아 영성을 상실한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고 개인적 영성을 추구하는 양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수도적 삶을 연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영성과 가장 충만한 영성은 형제들과 연합하는 친교 속에서 성령 충만한 경험을 이루며 우리의 영성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4)코이노니아 공동체에 맡긴 하나님 나라 역사
여기서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살펴 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교회의 전도와 기도 사역을 가르칠 때에 이 코이노니아 공동체로서 사역하는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마 18:19~20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코이노니아 영성을 가르쳐 주는 말씀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또 한번 중요한 코이노니아 영성을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18장 이 부분은 영혼을 구원하고 죄 범한 형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기도하는 사역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기도 사역을 할 때 합심하여 기도사역을 하라 하십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는 것 그것이 코이노니아 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세 사람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성탄은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성육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교회 공동체 곧 코이노니아를 이룬 공동체에 예수님께서 임재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공동체로 성육신하시는 예수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되고 주님께서 이 하나된 공동체에 오셔서 하나되는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누리게 됩니다. 인간끼리 즉 신자끼리 하나되어 합심하여 기도하고 거기에 주님이 임재하여 오심으로 하나되는 놀라운 축복의 경험을 이루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혼 구원과 죄 범한 형제를 회복하는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면서 그 기도가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합심 기도여야 함을 말씀 하시고 합심 기도 속에 주님도 오셔서 합심하고 함께 역사하는 것으로 영혼 구원의 역사와 영적 전쟁을 치루고 마귀를 묶고 영혼을 풀어내는 사역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온전한 영성이 아니면 영적 승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온전한 영성, 코이노니아 영성으로 기도하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가 하나되어 주님 안에 있게 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그렇게 됨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주님과 우리가 함께 하는 사귐인 코이노니아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영혼 구원과 회복의 사명을 맡기시고 코이노니아를 이루고 기도하므로 영적 승리와 영혼 구원의 사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기독교의 사귐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하나되고 사람간에도 하나되는 연합의 코이노니아 입니다. 교회는 그러므로 코이노니아 공동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영성은 개인적 영성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코이노니아 영성 입니다. 이 코이노니아 영성을 이룰 때 영성은 가장 건강하고 충만합니다. 그리고 이 코이노니아 영성을 이룬 교회가 사역의 능력, 영적 전쟁을 승리하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이 코이노니아 공동체의 경험이 교회 안에서 잘 안 일어난다는데 과제가 있는 것이며 여기서 이 코이노니아 경험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교회 구조로서 소 그룹 교회 구조가 재 평가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교재가 좋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가 좋은 것에 좌우됩니다. 교회에서 공과 공부나 하는 정도의 교회 교육이 아니라 서로 삶을 나누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하여 기도하고 함께 기도하여 응답 받고 함께 성령을 체험하는 현장이 되어야 기독교 교육은 살아 있는 교육이 됩니다. BCM 교육이 아이들과 만남을 전제로 주일 이외의 만남을 권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코이노니아 영성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학생들이 코이노니아를 경험하게 되느냐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경험을 위한 소그룹
1)코이노니아 경험을 위하여는 소그룹 모임을 하라
2)소그룹 모임은 삶을 나누는 모임으로 하라
3)삶을 나눔은 (1)예수님 자랑하기(감사 나누기) (2)예수님 기대하기(기도제목 나누기) (3)예수 이름으로 축복하기(사랑의 중보기도)로 하라
4)코이노니아는 사랑과 성령으로 하나되는 경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