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대회 강의안 전문-1

▲ 이강천 목사(바나바훈련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위임하신 사역들을 이루어야 하는 사역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의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이번 주제가 성령사역이기도 한데 예수님의 성령사역을 모본으로 깨닫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들
우선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에 당신의 시간들을 쓰셨는가를 살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섯 가지 사역에 당신의 시간과 노력을 집중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마 9:35~10:1
35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10:1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첫째는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인생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참된 행복의 삶을, 진리를 가르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둘째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역, 복음전도 사역에 시간을 사용하셨습니다. 가르치는 사역과 복음 전파 사역은 때때로 동시적이고 하나로 시행될 때가 많았겠지만 하여튼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주로 하였습니다.
셋째는 병을 고치는 치유사역에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보고 그냥 지나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각색 병자를 고치는 사역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넷째는 이러한 사역을 나누어 이어갈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하시는 제자훈련 사역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훈련하시고 70인 전도자들을 훈련하시고 하였습니다.
다섯째는 기도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하면서 나의 사역이 이러한 본질적 사역이 아닌 비본질적 사역으로 더 많은 시간이 소모되고 정력이 소모되고 건강이 나빠지고 일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사역은 무엇에 집중되고 있습니까? 무슨 일로 바쁘십니까? 이 본질적 사역을 찾아가는 라이프 스타일이 되고 사역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1/사랑의 동기
예수님이 이러한 사역에 집중하였을 때 예수님의 사역에는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사랑의 동기입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 때문에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동정의 눈길 이었고 그 사랑의 동기가 예수님의 사역을 하는 동인, 헌신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 방황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므로 저들에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행복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가르침의 대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프로그램을 돌리려는 생각으로 사랑 없이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건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동인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예수께서 치유사역을 하실 때도 병들어 고생하는 그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므로 고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이 기적을 보이기 위한 것이거나 당신의 사역을 시위하는 것이 아니었고 병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그 사랑과 동정이 치유사역에 시간을 쏟게 하신 것입니다.
마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예수께서 오병 이어의 기적으로 무리를 먹이시던 일도 결국은 기적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배고픈 무리가 불쌍해서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의 동인이 언제나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에서 분출하고 있었음을 봅니다. 우리에게도 이 사랑의 영이 움직이기를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교육사역이 무엇입니까? 이 불쌍히 여기는 사랑으로 인생을 돌보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 사역의 특징2/ 능력사역
 예수님의 사역의 두 번째 특징은 성령사역, 능력사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교리나 신학이나 전통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예수님은 사랑으로 살아있는 진리를, 능력으로 가르치고 고치고 살리는 사역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막 1:21~22, 27
 21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서기관들과는 전혀 다른 권세를 느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가르침에 압도되고 병든 자들은 치유되고 귀신은 쫓겨 나가는 역사를 일으키는 그러한 살아 있는 사역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교육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오늘날 교육이 서기관이나 율법사처럼 교리를 해설하고 신학을 설명하고 전통을 이야기하는 스타일의 교육이라서 아무런 생명도 능력도 없는 것이 아닐런지요? 예수님처럼 영적 파워가 우리의 설교와 가르치는 사역에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은 어떻게 능력사역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 사역에 어떤 소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예전에는 예수님이 능력 있게 사역한 것이나 기적을 행한 모든 것은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인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고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집중하여 읽고 묵상하다가 깜짝 놀라고 큰 도전과 비전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도원 생활을 7개월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망향 기도원에 들어간 것이 1988년 12월 12일이었는데 그 해 12월 24일 성탄 전날이었습니다. 기도원에 기도하러 왔던 사람들이 모두 집에 본 교회에 가서 성탄절을 지내기 위하여 썰물처럼 다 빠져나간 오후에 누가복음을 읽고 있었습니다. “홀로 남았더니”하는 시간은 때때로 위대한 일이 시작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곤 하는 모양입니다. 그날 눅 4장 14절을 읽다가 번개같이 떨어지는 깨우침과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눅 4:14~15
14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님이 능력 사역을 한 것은 그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사역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시더니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승리하시고는 더 한 성령의 권능을 받아가지고 사역의 무대로서의 갈릴리로 가셨다는 기록이 예전에도 있었건만 이날 섬광처럼 빛나며 내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으로 사역했다는 이야기잖아.”

맞았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인간의 한계 안에 들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먹지 않으면 배 고프고 자지 않으면 졸립고 그래서 배를 타고 가실 때 배 고물을 베고 주무신 이야기도 있습니다. 과로하면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쉬시다가 여인을 전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시라도 인간의 몸을 입고 지상에 계신 동안 인간의 한계 안에 사셨고 인간의 한계 안에 있으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능력 있게 사역하신 것은 철저한 성령의 권능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 누가복음의 증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도행전에서도 누가는 동일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이 말씀이 생명처럼 분출하는 소망을 일으키므로 나는 즉시 천안시내에 가서 모조 전지와 매직펜을 사 와서 큰 글자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라는 글 귀를 써서 방 벽면에 붙이고 그날 그 시부터 나의 기도는 오직 이 한가지 기도제목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가게 해 주십시오”

새벽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저녁에도 이 한가지 제목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습니다. 이 기도 제목이 응답된다면 우선 갈릴리로 돌아가니 고침 받아 회복되어 일터로 간다는 것과 이번에는 성령의 권능으로 일터에 가서 성령사역으로 권능 있게 사역한다는 소망으로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 소망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3월1일 휴일을 맞은 동기생 친구 목사가 내게 문병 와서 보더니 이러한 방에서 지내면 건강한 사람도 병들겠다면서 좀 밝고 깨끗한 곳으로 옮겨 주어야 겠다고 나의 짐을 챙겨 가지고 나를 자기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갔습니다. 대청 호수가 있는 대전시에 편입되어 있는 시골 추동 쪽이었는데 낮은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서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제 다 왔어 저 아래 기도원 입간판이 서 있지? 저기서 우회전하여 3백미터 정도 가면 돼”

나는 입간판을 처다 보았습니다. 멀어서 금방은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었으나 점점 가까이 가면서 기도원 입간판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갈릴리 기도원”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두 달 넘게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보내 달라고 기도했더니 웬 갈릴리인가 싶었습니다.

하여튼 갈릴리 기도원에 와서 새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며칠 되지 않은 어느날 저녁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고쳐 주랴?” 물으시는 것 같아
“주님 고쳐 주십시오” 대답했습니다.
“내가 너를 고칠 것을 네가 믿느냐?” 다시 물으시는 것같아서 얼른 대답하는데
“주님 제가 언제 신유를 부정해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나는 반문하는 것이었고 주님은
“누가 그렇게 묻는냐? 지금 네가 믿느냐고 묻는 것이다.”라고 되물어 도전하였습니다. 나는 얼른
“믿습니다.” 라고 대답하려고 하였으나 그 순간 내가 밀양에서 목회하던 시절이 생각나고 주님은 나의 목회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돌리는 듯 했습니다.

밀양에서 목회할 때 많은 신자들이 몸이 아프면 날 보고 안수 기도하여 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안수 하였으나 한 사람도 고침 받는 것을 보지 못하며 몇 년이 가자 “내가 안수해도 안 낫는다”는 믿음이 굳어져 그 다음부터는 건성으로 안수하던 목회를 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나의 불신앙, 신앙인의 불신앙을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같아 속히 고백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나의 믿음을 교리적인 믿음이나 지식적인 믿음에서 살아 있는 현재적 신앙이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잠시 쉬고 있는데 기도원을 맡아서 목회하고 있는 전도사님 어린 아들이 어제밤 뱀새 열이 나고 고통하였는바 오늘 아침 “빨리 아침 먹고 병원에 가자” 하였더니 어린아이가 “아빠 병원부터 갈 일이 아니고 우리 기도원에 와서 기도하고 계신 이 목사님에게 안수 받으면 어떨까?" 라고 한다면서 내게 열병으로 고통하는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가슴이 두근 거리고 열이 오르는 듯 했습니다.

“주여 시험하지 마시고 역사하소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손을 얹고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어 고치신 것이 생각나서 나도 꾸짖으며 기도하고 나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였더니 이 아이가 아멘 하더니 “아이구 이제는 살았다.” 그러면서 뛰어 나가 노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짜고 한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하고 이 아이하고 짜고 나를 교육시키려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열병이 돌림병이라 다음날에는 전도사님 딸 아이가 열병이 나서 데리고 오고 다음 날에는 아래집 아이가 열병이 나서 데리고 오면서 졸지에 치유사역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더니 신장병 환자, 치질 환자, 중풍병 환자 등 어른 신자들이 와서 안수 기도해 달라고 하는 바람에 떨면서 매일 기도하면서 안수하여 낫는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보내 달라고 기도했더니 갈릴리에 보내 놓고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 전도사님에게 전도훈련을 시키면서 매주 전도하러 나갔더니 전도현장에서도 환자가 치유되는 경험도 하면서 결신이 일어나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성령의 권능으로 갈리리에 머물며 전도와 치유와 제자훈련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여기서 기독교의 사역은 철저히 성령사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령사역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는데 여러분 이에 동의하시고 기도하실 것이지요?
 
기도 외에는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도 성령 사역이었으며 우리의 사역도 성령사역이어야 함을 배웠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 사역을 위하여 어떤 비결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겠지요. 예수님의 성령사역의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다음 성경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막 9:28~29
28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 산상에 올라가신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산 아래 남아 있던 제자들에게 어떤 사람이 벙어리 귀신이 들려 말 못하고 자주 넘어지고 거품을 흘리는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하였는데 제자들이 씨름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고 그 때 예수님이 오시고 보시고는 고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쉽게 고치고 귀신을 쫓아 내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그 귀신을 능히 쫓아 내지 못하였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나와 같으냐? 나는 하나님이고 너희는 사람이 아니더냐?” 그렇게 대답하셨습니까? 아니지요.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즉 차이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가 기도하는 만큼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사역의 비결은 기도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만큼 우리도 기도하면 우리도 그렇게 성령사역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생활이 어떠했었는지 살펴 보아야 하겠지요? 저는 다시 사복음서를 펼치고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단서를 얻을 수 있는 모든 성경을 찾아 보았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이 찾아 보기로 하지요.

40일 금식기도
우선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할 때 젊을 때 장기간 금식 기도하는 것도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하여 금식기도 한다면 그것은 고생하는 만큼의 가치가 충분하며 우리 모두 도전해야 할 일입니다. 각자의 체력의 분량을 따라 장기 금식 기간을 정하고 기도할 일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금식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야망이나 오기로 금식하지 말고 기도 가운데 성령의 감동과 지시와 인도 속에서 금식하여 보십시오.

새벽기도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금식기도는 생애 한 두번 결단하고 할 일이나 한 번 금식기도한 것으로 평생 성령 충만하고 성령사역 한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매일 이루어지는 기도의 생활화가 더 중요하겠지요.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어떤 것일까 할 때 먼저 예수님은 새벽에, 이른 아침에 기도했습니다. 젊어서 목회할 때 새벽기도가 하도 힘들어서 “어떤 녀석이 새벽 기도는 만들어 가지고 이 고생이야?” 투덜댄 적이 있는데 그 님이 만드셨더라고요. 예수님은 새벽마다 일과를 시작하기 앞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사역을 하시곤 하셨던 것입니다.

저녁기도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 다음에는 밤에 저녁에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목사들에게는 싫든 좋든 새벽기도를 하게 구조적으로 되어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살피다가 놀란 것은 꼭 저녁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일과를 마감하면서, 사역을 마감하면서 꼭 기도의 자리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전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마치고는 푹 퍼지는 경향인데 예수님은 꼭 사역을 마감하면서 기도의 자리를 찾았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의 깨달음이었습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은 그것을 잘 보여 줍니다.

마 14:22~23
22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막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습관적 기도
예수님은 새벽기도 하시고 저녁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어쩌다 한번 한 것이 아니고 습관적으로 라이프 스타일로 행하신 기도의 생활이었습니다.

눅 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다는데 감람산에 왜 가셨습니까?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이 같은 아침 저녁 기도는 예수님의 습관이었고 라이프스타일이었음이 틀림 없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깨닫고 내 기도생활에도 적용하려 애써 보았는데 무엇보다 저녁 기도는 쉽지 않았습니다. 저녁기도가 제대로 되기 위하여는 저녁 일정한 시간에 기도실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러던 어느날 주께서 저녁기도를 목숨 걸고 해 보라고 도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저녁 기도 1천번제 즉 1천일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저녁기도를 하기로 서원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다만 시작부터 몇가지 예외를 인정하여 받아 달라고 하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는 하루도 빠짐 없이 저녁 기도를 하되 예기치 못한 일로 저녁 늦게 들어오면 잠을 안 자고라도 기도할 것이나 예상되는 저녁 사역이 있을 때는 저녁을 앞 당겨 오후 기도를 하고 나가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하고 다음은 이동 중일 때 즉 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하고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기도하는 일도 인정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그러한 조건으로 저녁 기도 1천번제를 서원하고 기도 훈련을 해 나갔는데 마침내 천일 동안 저녁 기도를 할 수 있었고 그 기간 동안 저는 대단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동안에 훈련원 새 캠퍼스를 선물 받게 되었는데 폐교된 초등학교를 사고 수리하고 또 뒷땅을 더 사고 하면서 약 7억 5천만원이 소요 되었는데 그것이 어려움 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축복은 나의 설교 사역, 말씀 사역이 능력을 경험하며 감격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현장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고 감동하실 뿐 아니라 설교 듣다가 병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간증이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동안 성령께서 그 설교를 사용하시면서 치유도 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두가지 간증하지요. 연무 중앙감리교회에서 3일 간 부흥회를 했습니다. 치유 설교를 한 것도 아니고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한 것도 아닙니다. 치유를 위한 특별한 시간은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둘째날 점심 식사를 대접하던 남자 집사님이 6년동안 목디스크로 고생하며 병원, 한의사, 침술사, 지압사, 안마사 찾아 다니며 노력해도 안 낫던 것이 첫날 설교에 은혜 받으면서 고침 받았으며 너무 상쾌하고 좋다고 목을 돌려 보이며 간증하더니 그 기간에 7명이나 치유된 보고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고 담임 목사가 “어떻게 내가 설교할 때는 한 사람도 나았다는 간증 없는데 이 목사님 설교에 그러한 역사가 있는 것이지요?” 하고 묻길래 “이제부터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도 그런 일이 있을 터이니 믿고 성령께서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성실한 설교를 해 보십시오.” 라고 격려했습니다. 몇 달 후 그 목사님이 자기가 설교할 때도 치유의 역사가 보고 된다는 간증을 해 주었습니다.

한번은 한남대학 교수들 중에서 한 그룹이 교수수련회를 주최하고 날 강사로 불렀습니다. 장소로 정한 수양관에 가 보니 30여명이 모였습니다. 한남대 전체 교수 수련회가 아니고 한 클럽에서 하는 것이라 조촐한 모임이었습니다. 나는 강대상으로 올라가지 않고 둘러 앉자고 제안하고 나도 앉아서 설교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예배를 마치자 여자 교수님 한분이 간증하고 싶다고 우리를 잡아 앉혔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몸이 아파서 간신히 학기 끝내고 요양을 위해 휴직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이럴수록 은혜 받아야 한다며 동료 교수님들이 도와 여기 왔습니다. 두시 간 앉아 있기도 힘든데 오늘 저는 두 시간 앉아 은혜를 받다가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 내장 기관들이 아팠는데 다 치유받았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뻐하며 주께 영광 돌렸습니다. 오후에 시작한지라 저녁에 두번째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남자 교수 한 분이 간증하겟다고 또 우리를 붙들었습니다.

“저도 사실은 첫시간에 은혜 받다가 고침 받았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간증하지 못하고 나아가 확인절차를 거쳤습니다. 다리 관절통으로 걷기 힘들고 운전하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첫시간 설교 듣다가 고침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 끝나고 수양관 뒷산을 오르며 그리고 내리며 확인해 보니 관절통이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할렐루야.” 이 때 설교는 창12장 “북의 근원이 될지라.” 제모그이 설교지 본격적인 치유설교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설교 중 치유의 역사가 자주 일어나게 되고 한번은 정말 희한한 기적이 있었습니다. 카나다 캘거리 제일교회서 부흥회를 하는데 한국말을 잘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2세 청년이 호기심에서 마지막날 참석해 보았는데 그 청년은 5년동안 아버지와 갈등 관계에 있으면서 화해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날 설교는 화해자의 삶을 마5:9말씀으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적중될 메시지지만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이 문제지요. 이 청년이 한국말을 못 알아들으므로 특별한 일이 있을까 호기심에서 오긴 왓는데 특별한 것도 없고 알아 듣지 못하는 설교에 기압을 받고 있구나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어느 순간부터 이 강천 목사가 영어로 설교하므로 그 청년이 다 알아 듣고 화해의 메시지에 감동되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 날밤 아버지와 화해가 일어나 부등켜 안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다음날 자기 영어 목회 담당 목사에게 간증했더니 영어 담당 목사가 충격을 받고 기도실에 들어가 하나님께 어찌된 것인가고 항의하다가 깨닫고 자신도 회개하고 기도의 사람으로 성령 사역을 해야 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다짐하게 되었다고 내게 보고해 주었습니다. 이강천 목사는 그 때 영어로 설교한 적이 없고 한국말로만 설교했는데 성령께서 통역을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도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사역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성령사역 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되겠는데 과연 우리도 성령 사역이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처럼 사역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근거는 무엇인가요? 대답은 그렇다이며 근거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성령시대이며 그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 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 예수님의 하시는 일과 더 큰 일을 더 능력있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사역하면 예수님의 분량 그보다 더 큰 분량도 하리라는 것입니다.

요 14:12~14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이 약속은 사도행전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실행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 설교하여 3천명이 회개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나 베드로가 성령 받은 후 설교하자 한 번에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치유 사역만 해도 예수님이 모든 병자를 고쳤지만 안수하거나 말씀으로 선포하거나 혹 환자가 그의 옷가를 만지자 나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베드로는 그림자만 지나가도 병자가 일어나고 바울은 손수건만 가져다 닿자 고침이 일어났습니다.

성령 사역은 그 가능성의 한계를 두지 않습니다. 무한 가능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보다도 더 크게 사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성령사역을 사모하고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과 불로 기름부음 받기까지 부르짖고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성령사역이 아니고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 사역이 불가능합니다. 성령 사역이 아니고는 영혼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성령사역이 아니고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성령 사역이 아니고는 주일학교 부흥도 교회 부흥도 불가능합니다. 성령 사역을 사모하고 기도하고 추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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