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0:18~19

거지가 깡통을 시끄럽게 차고 가고 있었습니다. 옆에 가는 이가 시끄럽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이사가는 것입니다. 나도 잘 살 날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좋은 것입니다. 생은 기다리는 시간들로 이어집니다. 어린아이는 자전거를 탈만한 나이까지, 젊은이는 차를 운전할 수 있을 때까지, 의학도는 면허증을 받을 때까지, 직장인은 승진할 때까지, 남편과 아내는 가정이 평온하여지기 위하여 집을 살 때까지, 고향을 찾아가는 이들은 도로가 막혀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의 기술은 한 순간에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기다림은 우리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지루한 숙제요 의무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하나님도 기다리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도 기다려야 하고 우리들도 기다려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그 이유에 대해 너무나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라고 했습니다. 무슨 은혜를 베푸시려고 하나님은 그렇게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유명한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탕자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죽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졸랐습니다. 그리고 나가 창녀들과 허랑방탕하고. 마침내 거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천히 여기는 돼지를 치며 쥐엄 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잘 곳도, 먹을 곳도, 사랑을 할 곳도, 사랑을 줄 곳도 없었습니다. 육적 거지요, 정신적 거지요, 영적 거지가 되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고 있을 때에 아버지는 아들을 계속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아버지가 기다리던 보람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탕자는 드디어 깨달았습니다(눅 15:17-19). 탕자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았으니 더 이상 탕자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때때로 나와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를 돌이키기 위해 힘써도 안 되고, 애써도 안 되고, 앞을 봐도 절망이요, 뒤를 봐도 가망이 없을 때에 우리는 종종 포기하거나 극단적인 방법을 모색하려는 충동이 일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은 답답하고 해결 방법은 없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좀 단순하고 무식해보이지만 탕자의 아버지처럼 아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었으니 우리도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기도응답을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아무리 확실하게 약속을 했어도 그 약속에 대한 성취에는 반드시 기다림이 전제됩니다. 즉 기다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때를 따라서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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