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 흉년을 피해 블레셋 땅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우물들을 파게 되는데 이 우물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을 다시 파면서 이삭은 생수를 얻게 됩니다(창 26:12~22). 선조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팜으로 생수를 얻는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현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이 포스트모던의 정신적 특징은 기존해 있는 가치의 해체를 들 수 있습니다. 문학의 세계에서도 해체를 논하지 않으면 감히 축에도 못 끼는 촌뜨기같이 취급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여지없이 무시되고 깨지면서 새로운 기초를 형성하려고 하는 것이 이 시대정신이지요.

그런 정신과 사고가 지배하는 현대에서 옛 우물을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시대에 역사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이 얼마나 뒤쳐진 생각일까요? 하지만 기독교가 역사의 종교라고 한다면 우리의 실존적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되고,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성결교단의 정책이 교단의 브랜드가치의 창출이고, 민족교회로의 자리매김이라는 송윤기 총무의 말은 현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뿌리 깊은 민족의식과 주체의식의 정서를 잘 짚은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 특히 역사의 문제에 천착(穿鑿)하는 모습에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단의 기층(基層)에서 일어났던 성결신앙이 어두운 민족현실과 조우하면서 민족의 희망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을 매우 고무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강경성결교회와 관련된 몇 가지의 역사적 자료들이 숨겨져 있었는데 주지하시다시피 최초 신사참배거부사건은 하나님 주권사상, 성결신앙, 재림신앙, 민족사랑을 배경으로 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한 백신영 전도사는 대한애국부인회의 창설멤버입니다. 그런데 이 대한애국부인회사건이 분명히 우리 교단의 전도사가 결사대장이었고, 그 사건과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었는데도 불구하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여성운동사로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역사인식의 부재로 보화를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신사참배거부 사건 뒤에 이어진 상애어린이단의 사건은 성결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민족사랑과 연결되어 있었던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43년에 교단이 폐쇄되기 직전에 이헌영 목사가 일본형사가 취조과정에서 일어난 일화는 우리의 재림신앙이 민족정신과 어떻게 조우하였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형사가 “당신이 믿는 예수가 다시 오신다며?”, “예, 다시 오십니다.”, “왜 오시는가?”, “예, 심판의 주님으로 이 세상을 선악 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래? 그러면 우리 일본천황폐하는 어떻게 되는가?”, “예, 천황도 사람인고로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심판받습니다”, “뭐야 심판? 이 정직한 바보야”

결국 이 사건으로 이헌영 목사는 옥고를 치루고 교회 폐쇄의 아픔을 맛보셨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이 억압받고 있을 때 다가오는 새 나라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끔 경성시켜주는 종말론적 재림신앙의 표출로 기억할 수 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우리 지방(현 충남지방회)의 홍산 지역에서는 만세운동을 성결교회에서 주도적으로 끌어가려고 했습니다. 그 속에서 매국노의 밀고와 애국으로 향한 여전도사와 교인들은 큰 고초를 겪게 됩니다. 강경성결교회에서 70여전에 개척한 병촌교회의 66명의 순교사건은 우리 성결신앙의 붉디 붉은 피의 꽃으로 피어난 영광스러운 역사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강경성결교회에서 일어난 일만으로도 이런 다양한 사건들을 묶어낼 수 있는데 일제시대, 또는 6.25의 전쟁을 겪어가면서 당시의 우리 교단이 가졌던 사료들을 발굴해 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많은 자료의 묶음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증언의 무더기가 사라지기 전에 즉, 더 시간이 가기 전에 그 역사들을 시급히 발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구전(口傳)과 또는 사진이나 아티클 같은 것에서도 분명히 사료적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관심입니다. 진정으로 교단을 사랑한다면 내가 속한 교회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지역교회에서 일어났던 이런 사료들을 발굴하고 통합하여 본다면 아마도 저 유럽의 고색찬연한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성결교회의 고유한 아우라를 빚어낼 것입니다.

성결교회 역사를 너무 주역들에 대한 역사로만 논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위 엘리트역사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주역들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목회현장에서는 주역들의 역사와 기층에서 가졌던 역사체험 사이에는 무어라 말하기 곤란한 간극(間隙)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뭔가 연결고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속히 해소해야 합니다.

교단의 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정기적인 역사포럼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거창하게 포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냥 역사가 깊은 교회들이 숨겨진 역사를 발굴하여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거기에서 나온 자료들을 재해석하여 교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이런 자료를 가지고 교단의 정책을 수립하여 교단의 브랜드가치창출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103년차 총회에서 구 강경성결교회예배당을 매입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건물은 앞으로 성결교회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자리매김을 할 것이며, 교단의 이미지향상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옛 우물에서 생수를 퍼내는 일은 이 메마른 세대를 적셔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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