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영성은 ‘모든 길들여진 것들 그리하여 그 속에 자신을 안주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근본적 반성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생 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는 “나를 길들여 달라”고 청(請)하는 여우에게 오히려 ‘길들여짐’의 의미를 묻는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왕자의 거듭된 질문에 여우는 길들여짐(tamed)의 의미를 2개의 형태로 설명하지요. 하나는 소위 세인(das Mann)들의 경우 그들에게 ‘길들여짐’은 이데올로기로서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학습된) 상태’를 뜻하지요.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우린 우리가 길들인 것밖에 이해할 수 없어.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것을 이해할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아.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건만 산단 말이야. 그러니 어딜가도 우정을 살 수 있는 가게는 없어. 사람들에겐 이제 친구도 사라질거야”라고 말하지요. 또 하나의 경우 ‘진정한 길들여짐’은 ‘인연을 맺는 것’(to create ties')이지요.(박지현역, 인용) 이때 ‘ties’의 의미는 ‘관심’(Sorge)이고 ‘배려’이며 또 ‘유일한 존재나눔’(only sharing a being itself)이고 사랑이겠지요.

이죽내(李竹內) 선생님은 4년 전 경대의대 신경정신과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지금은 제자가 운영하는 시내 D병원에서 상담고문을 맡아 직접 진료도 하십니다. 그분은 한국신경정신의학계의 원로이시고 자타가 공인하는 융(C.G.Jung) 전문가이시며 원효연구에도 일가를 이루셨지요. 대구경북지역의 ‘명의(名醫)’ 중 한분이시고요. 무엇보다 그분의 그분다움은 원효처럼 평생 ‘무애(無涯)’의 삶을 자타공인으로 살아오셨다는 점이지요.

그분은 가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지요. “정신과 의사는 다 미친놈들이지요.” 이 선생님께는 술과 관련된 신화적 에피소드들이 많은데 최근에는 아예 수도승처럼 술을 멀리 하신다지요. 건강을 위해서. 함께 형이상학 소위 마음공부를 할 때 가끔씩 제게 “목사님은 술도 못 마시고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라고 농담하곤 하셨지요. 처음에는 저도 ‘그저 농담이겠거니’하고 웃고 말았는데 점점 그 농담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나를 깨우치는 또 한 분 스승의 목소리로 들리더군요. 설령 그분 스스로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해도 그 농담 속에는 오랫동안 짓눌려 있으면서도 결코 벗어날 수도 없고 스스로 화해할 수도 없었던 피 흘리는 내 영혼의 자화상을 치유하는 화두(話頭)가 있더라는 뜻입니다.

술이 그저 술이 아니라 “자기해방의 통로”이고 ‘술 마시는 행위자체가 진정한 자신과 대면하는 ‘의식’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의 눈에 비친 목사는 아마 ‘답답함 그 자체’였겠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하게 미친 놈’이란 뜻이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목회자들이 숙명처럼 짊어지고 사는 소위 “‘목사의 인격’이란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허위의식입니까? 굳이 ‘인격(person)’ 혹은 ‘인격성(personality)’이라는 개념의 어원이 ‘가면(persona)’이라는 사실과 ‘도덕(moral)’이라는 개념의 어원이‘습관(mos-moris/cust om, habits)’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반성 없이 짊어지고 있는 인격과 도덕의 허구성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리라고 여깁니다.

내 속에서 비롯된 나 자신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세상(공동체 혹은 세대)이 나에게 덧입혀 준 것이고 그러기에 단지 ‘학습된 것’ 곧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목회자의 인격은 그 지긋지긋한 이데올로기를 벗어버리고 생생한 자기 자신의 삶을 회복하고자하는 근본적 갈증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 나라’는 ‘인간(땅)의 나라’가 내게 덧입혀준 모든 문법과 가치체계를 배설물처럼 버리는, 영적 각성(혁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목회자(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영성은 ‘모든 길들여진 것들 그리하여 그 속에 자신을 안주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근본적 반성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고(故) 방성규 목사는 ‘사막에로의 여정(旅程)’을 제안하면서 그 여정을 모든 ‘길들여진 것들과의 결별의 삶’이자 ‘하나님에게로의 비상(飛翔)’이며 ‘삶의 전환(virtuous 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방성규, ‘모래와 함께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 71~75쪽 참조) 이러한 삶의 전환이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목회자는 자기 자신과 진정으로 화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타자(他者)에 대한 진정한 배려와 (존재)나눔을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때에야 비로소 목회자의 모든 ‘희노애락’은 단지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서의 스캔들(scandal)이 아니라 자기 삶의 자연스러운 본성(pathos)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어린 아이의 영성’은 곧 ‘길들여지지 않은 영성’이고 ‘자연을 닮은 영성’인 것을 경험하게 되겠지요.

2010년 한 해의 출발선에서 우리 모두가 ‘모든 길들여져 있는 것들 그래서 너무나 익숙하여 그것 없이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것을’도 내려놓고 한번쯤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사막에의 여정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먼 거리를 여행했느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순례의 도상에 있다는 것이고 또 모든 순례는 언제나 변함이 없는 중심을 향해 문을 박차고 나아가는 것”(방성규, 같은 책, 14쪽)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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