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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738호] 2010년 01월 23일 (토) 00:00:00 이정희 부장(CBS보도국 부장) webmaster@kehcnews.co.kr

최악의 지진 참사로 생지옥이 돼버린 중앙아메리카 아이티에 대한 뉴스가 연일 쏟아지고 있습니다. 무려 20만 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도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며 생명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정부 기능까지 마비돼 곳곳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구호품이 탈취당하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내전과 쿠데타가 반복되는 비극의 땅에 엄청난 지진까지 발생했으니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이티의 슬픔을 함께 나누려는 세계의 도움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각국 정부는 모두 13억 달러에 달하는 현금과 구호 물품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이티의 1년 수출액이 5억 달러를 조금 넘는 것을 감안하면 국가 전체를 재건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국내 기독교계의 지원 움직임도 활발합니다. 각 교단이 앞 다퉈 돈과 구호물품 지원을 결의하고 나섰고, 수많은 기독교 봉사단체들도 아이티 현장으로 이미 떠났거나 지원자를 모집 중입니다. 이렇게 지구촌 전체가 힘을 합해 돕겠다고 나선다면 머지않아 아이티에는 눈물이 그치고 희망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아이티의 비극을 보면서 오래 전에 읽은 ‘가난한 휴머니즘’이라는 책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이티의 실각한 지도자 아리스티드가 지은 짧은 편지 형식의 책입니다. 그는 가톨릭 신부이자 대표적인 해방신학자입니다. 가난한 아이티를 위해 평생을 투쟁 중인 그는 4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그 때마다 쿠데타로 권력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주로 미국의 사주를 받은 독재세력과 쿠데타 세력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아이티가 제2의 쿠바가 되는 것도, 난민들이 무더기로 미국으로 몰려오는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이런 지정학적인 이유 외에도 미국이 그를 증오한 근본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리스티드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일관되게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휴머니즘’이라는 책도 세계화와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약소국을 얼마나 잔혹하게 착취하느냐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부분이 채워져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소개한 ‘크리올 돼지’ 이야기는 미국의 거대 축산업자들의 사악한 농간이 잘 묘사돼 있습니다.

크리올 돼지는 아이티 민중들이 가가호호 사육하는 맛있고 질 좋은 돼지였습니다. 사흘을 굶고도 살아남는 질긴 생명력으로 경제성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축산업자들은 이 돼지들이 전염병에 걸렸다면서 모조리 도살하고 대신 자기네들이 공급하는 크고 살진 돼지를 키울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 돼지는 맛도 없었고, 비싼 미국산 사료를 쓸 수밖에 없어 영세 사육농가는 더욱 가난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라의 지도자가 이런 진실과 도덕의 편에 선 것이 국민 전체를 도탄에 빠트리게 한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런 힘도 가지지 않은 채 양심만으로 양육강식이 판치는 국제사회에 저항한 결과, 아이티는 더욱 나락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먼저 독립하고, 한 때 사탕수수와 커피 생산으로 서인도제도의 부국이었던 아이티였지만 정치적인 비극에 엄청난 자연재해까지 반복되니 아이티의 민중들은 대다수가 하루 2달러로 연명하는 초라한 신세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악의 논리’가 판을 치는 국제사회 질서 속에서는 외세의 힘을 어떻게 적절하게 사용하고, 어떻게 나라 전체의 역량을 키워나가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됩니다. 국가 위기 앞에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 없이 모든 것을 외세의 탓으로 돌리고, 잘못된 세계화의 탓으로 돌리면 제2, 제3의 아이티는 연이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양심을 지키는 데는 반드시 지혜가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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