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섬기듯 고향교회 섬기는 지킴이
늦깎이 목회·고향교회에 부임 … 이장 맡아 고향 발전에 앞장도
“특별히 욕심은 없었습니다. 고향 복음화에 대한 마음으로 일했고 교회가 조금씩 선교를 해야겠다는 마음에 10개 교회를 돕는데 힘쓰고 있습니다.”
이갑영 목사(담양가산교회·사진)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목회 길에 들어서 지금은 고향에서 집안 어르신들과 마을 주민들을 섬기는 목회를 펼치고 있다.
그는 담양에서 태어나 90년대 초까지 담양과 광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93년 초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호성신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94년에 가산교회에 사실상 부임했다.
“교편을 잡으면서도 호남신학대학교 야간에 입학해 신학 공부를 한 적도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공허함과 답답함을 많이 느껴 늦은 나이에 목회에 헌신하기로 결정하였고 고향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부임한 담양가산교회는 담양읍내에 있었던 장로교단에서 분립해 가산리에 개척한 교회로 이갑영 목사의 부모님이 개척의 중심에 섰다. 물론 당시 담양에서 교편을 잡았던 이 목사도 참여했다.
“당시 예장통합총회 소속의 교회에서 장로로 10여년 헌신하던 아버님 등이 마을에 교회를 건립하기로 하였는데 마침 명동교회 백천기 목사님이 처가가 있는 이곳에 교회를 설립키로 하면서 뜻이 모여 7가정이 교회 개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농현상 등으로 성도도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 목사가 부임하게 된 것이다.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기 어렵다’는 말처럼 그 또한 나이가 적은 편이 아니지만 항렬도 낮았고 그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집안 어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그를 착하게 여겼던 집안 어른들과 마을 주민들은 그를 조용히 지켜봤고 그의 목회 사역을 후원했다.
처음 부임했을 때 그는 평소 하던 대로 성실하게 목회했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의 일을 거들면서 마을 속 교회로서 역할을 하기에 힘썼다. ‘마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는 마을 이장이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물론 집안 어르신이 이장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쉽지 않았지만 그는 이듬해 마을 이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목사가 이장을 하니 공무원들도 좋아하고 도에서 적극 협조해 주어 마을 안길도 포장하고 마을회관도 새롭게 지었으며 건강관리 시설도 설치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마을회관을 지을 때 교회 성도들에게 제안해 건축헌금으로 1천만원을 흔쾌히 내놓기도 했다. 교회 성도들에게 ‘마을을 위해 우리가 섬김을 보여주자’고 제안했고 모아둔 교회 리모델링 비용 4000여만원 중 1000만원을 마을을 위해 내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헌신과 마을 주민들의 모금, 군의 지원 등으로 마을회관과 건강 관리실이 지어질 수 있었다. 또한 담양군에서 친환경단지로 지정을 받아 무농약 재배법을 실시해 ‘대숲 맑은 쌀’ 등을 생산하는 일과 담양의 브랜드화에도 힘썼다고 한다.
마을회관은 아름답게 세워졌지만 교회는 습기가 차고 비도 세는 상황으로 이 목사와 성도들은 리모델링을 할 것인지, 아니면 재건축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평생 한번 짓는 성전은 새로 건축하기로 결정했다. 성도들 모두 고령으로 건축헌금을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2006년 황토 벽돌로 고향풍경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성전을 완공해 입당했다.
“건축과정에 성도들도 헌신했지만 출향한 고향 분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도 십시일반 헌금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열심히 마을을 위해 일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이 하나 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은퇴까지 4~5년이 남았지만 남은 기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목회할 생각이다. 인근에 공단이 들어서고 기숙형 아파트가 들어설 계획이 있지만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그래서 욕심보다는 마을 주민들을 섬기며 더욱 어렵고 힘든 이웃 교회를 돕는 일에 힘쓸 계획이다. 또한 은퇴 이후에는 마을 주민으로 돌아가 일반 성도로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생각이다.
“앞으로 기회만 된다면 타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을 대신에 마을 주민 모두를 섬기고 살피는 교회로 매일 점심식사를 대접하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고향을 지키는 사람의 몫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