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님께서는 요즘 교회의 부흥에만 관심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성령운동을 주제로 진행된 세미나에 참석했던 어느 작은 교회의 목사가 조금은 볼이 부어 있어서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교회가 부흥하는 데는 성령의 역사가 필연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교회부흥만을 목표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 요컨대 그 젊은 목사의 분노는,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성령의 역사를 도무지 체험하지 못하는 것처럼 매도당하는 느낌에 있었다.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려고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해왔는데 그 노력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도 가능하겠느냐는 항변이었다. 수많은 개척교회들은 앉은뱅이가 일어서보려고 용을 쓰듯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그 몸부림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성공한 목회자’라는 표현이 공공연하게 쓰이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신도 수를 늘게 하고 큰 교회 건물과 자체 기도원을 짓고, 거기다가 공원묘지라도 덤으로 마련하는 능력을 발휘했다면 그 목사는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받는 토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공한 목사는 설교 예화에서 성령충만의 본보기로 당연하게 인용된다. 본인 자신도 성령충만을 당당히 주장하고….

▨… 앗씨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삶의 전부가 되는 것을 목표했다. 그는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철저하게 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비움을 위해서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먹고 입는 것에 대한 욕망까지도 버렸다. 철저하게 가난해지고자 노력하였다. 그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고 성령의 임재조차 다르게 나타날 것인가.

▨… 예수께서는 한번도 누구를 이기거나 누구보다 잘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없으셨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모습을 보여주어야지 하는 마음은 없으셨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크레이머(R. Cramer)는 “예수에게는 승부욕이 없었다”라고 그의 ‘예수 심리학’에서 밝혔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마음이 성령 임재라면 성령충만은 교회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목회자의 진실성의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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