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어떤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늘 어두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가정에 들어오면 늘 화평이 없습니다. 그는 큰 집에 살고, 돈도 많고, 좋은 차도 타고 있는데 집에만 들어오면 식구들끼리 서로 싸웁니다. 자식들도 서로 만나면 싸웁니다. 그러니 기쁨이 없습니다. 가장인 아버지는 한탄했습니다. ‘자 우리 가정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만나기만 하면 서로 갈등이 있고 싸움이 있는가?’

그런데 자기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가난한 옆집을 보니 이 집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늘 웃음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고, 얼굴이 늘 밝습니다. ‘저 집과 우리 집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나?’

어느 날 집주인이 셋방을 사는 사람을 만나서 물어봤습니다. “당신네하고 우리하고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기에 우리는 늘 만나면 싸움이 있고, 당신 집은 만나면 웃음이 있고 늘 행복합니까?” 세 들어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댁에는 선한 사람들만 살고, 우리 집에는 죄인만 살아서 그렇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을 좀 해 주세요.” 그랬더니 셋방 사는 사람이 다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선생님 댁에는 전부 착하고 선하고 잘난 사람들만 살아서 뭐 하나 잘못되면 누구 책임이냐를 놓고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희 집은 그렇지 않습니다. 뭐 하나 잘못되더라도 ‘다 내 잘못입니다.’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어제는 밖에다 화분을 내 놓았는데 막내아이가 뛰어가다가 그 화분을 차서 깨뜨렸습니다. 그럼 막내아이가 ‘제가 발로 찼어요. 죄송해요.’ 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와서 ‘아니야 내가 화분을 거기 놓은 게 잘못이지.’ 그러면 아버지가 와서 ‘아니야 내가 어제 그걸 보고 치우려고 했는데 안 치웠어. 내 잘못이야.’ 그러면 할아버지가 와서 ‘아니다. 내가 애초에 시장가서 그 화분을 사오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면서 다 자기 잘못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화평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았지만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입었지만 역시 우리는 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싸움을 많이 하는 사람, ‘나는 잘하는데 네가 문제야’라고 말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상담에서도 가장 상담하기 어려운 사람은 문제를 가졌는데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있는 청소년들이 상담자 앞에 서면 상담자를 부모님이 보낸 첩자같이 봅니다.

우리 중에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 죄인에 불과합니다.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면 갈등과 분쟁이 생깁니다.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모든 행동은 투사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티가 보인다고 합니다. 평안은 다른 사람의 눈의 티를 빼어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의 들보를 보아 오는 것입니다. 평안은 내가 죄인임을 인식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에 잘못을 보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춰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서로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교회가 평안합니다. 남탓보다 자신의 문제를 먼저 찾는 사람이 교회에 많아져야 합니다. 교회는 평안할 때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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