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설교’란 설교가 회중의 의식과 신앙을 자극하여 말씀 앞에 철저히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고 감격 속에서 말씀을 향해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경청으로 향하게 하는 설교이다. 나아가 성령의 도움으로 삶의 변화까지를 이끌어 내는 설교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설교자와 회중이 바라는 ‘들리는 설교’이다.

그렇다면 ‘들리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사항은 설교의 내용이다. 야구가 소위 ‘투수놀음’이라면 설교는 누가 뭐라 해도 설교내용에 의해 승부가 난다. 설교가 들린다는 것은 곧 설교내용이 들린다는 것이지 설교자의 음성이 들린다는 차원은 아니다. 설교 내용이 들리게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설교의 내용이 새로워야 한다. 즉 회중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전혀 들어보지 못한 내용, 새로운 내용이어야 한다. 성경적 설교일 경우 본문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새로운 정보, 본문에 대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깊이 있는 해석은 들려지는 설교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

만일 상황설교인 경우라면 다루려는 주제에 대한 최신의 그리고 가장 정확한 정보를 준비하여야 한다. 이미 회중이 알고 있는 본문과 정보라 하더라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회중들로 그 본문을 보도록 설교자가 이끌 경우 회중들은 그 설교를 경청하게 된다. 설사 이미 알고 있는 메시지와 노출된 시각이라 하더라도 설교자가 회중의 감성을 자극하여 진한 감동을 줄 수 있으면 회중은 그 설교에 몰입하게 된다.

또한 회중들의 관심을 자극하는 내용, 자신들과 관계있는 내용이 그들의 경청을 자극한다. 따라서 설교내용과 관련하여 들리는 설교를 하려면 ‘새로움’ ‘감동’ ‘관심’이라는 요소를 필요로 한다.

들리는 설교가 내용의 문제이긴 하지만 동시에 설교전달 형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령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가에 따라 귀에 쏙쏙 들어오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사실 많은 설교자들은 평생 한 두 개의 설교형식을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전달하는 논리가 항상 일정할 수밖에 없다. 듣는 입장에서도 당연히 일정한 수용의 논리만이 사용될 뿐이다. 성경본문의 다양성, 회중의 다양성, 설교기회의 다양성 그리고 설교자의 발전 등을 고려할 때 어느 한두 가지의 설교형식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들리는 설교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설교의 수사적 치장이다. 설교를 ‘종교적 담화’라 한다면 설교 역시 연설 일반이 갖는 특징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말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 거짓을 진리처럼 들리게 하는 것과 훈련받지 않은 설교자가 진리를 거짓처럼 들리게 하는 양자택일 앞에서 설교자가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는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설교는 하면 하고 말면 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설교는 생명을 걸고 하는 증언이며 그 증언은 반드시 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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