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이 그렇지만 보스턴(Boston)도 특수한 곳이다. 청교도로 상징되는 미국 경건주의 신앙의 뿌리이지만, 하버드와 MIT로 대변되는 진보적인 지성의 온상이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대립은 한인교회 내에도 깊이 침투해 있고, 그런 정서를 잘 드러내는 표현이 ‘보스턴에는 집사보다 박사가 많다’는 냉소이다.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은 집사 호칭을 경박하게 생각하고, 집사 직분만 있는 사람은 박사 학위 소지자들을 교만하다고 여긴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보스턴의 한인교회들 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한 질병이다. 좌파와 우파에 대한 정확한 내용도 모른 채, 상대를 수구 꼴통이나 친북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교회도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서로가 하나님의 적자임을 항변한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오해에 반기를 든다. 태초에 하나님은 영성의 수련장소인 기도원이나 지성의 보루인학교가 아니라 천지(天地)를 창조하셨다(창 1:1). 틸리히가 존재(存在)라는 표현을 붙일 수 없다던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힌 존재와 직접 관계를 맺으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의도적인 개입은 단절될 수밖에 없는 영성과 지성을 하나로 연결하고, 공존할 수 없던 모든 대적관계를 화해의 끈으로 묶는다. 파스칼은 이런 하나님의 화해의 노력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에서 찾는다.

예수님의 성육과 십자가, 부활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화해의 정점이다. 이후 하나님의 화해는 헬라인과 유대인, 철학과 복음, 선교와 신학을 병행한 바울을 탄생시켰고,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웨슬리와 토마스 머튼, 본 회퍼, 헨리 나우웬 등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칸트가 주장한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는 이런 기독교의 화해로부터 차용한 흔적이 짙다.

어려운 목회현장은 화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도서관에서 씨름한 학문이 영적인 폭발력을 지니기 위해, 새벽에 텅 빈 교회에서 흘리는 눈물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했다. 신학적으로 예리한 설교도, 유학생들의 이삿짐을 옮기는 땀을 흘릴 때 은혜가 되었다. 담임목사부터 챙기는 성도의 정성을 보기까지, 휠체어에 앉아 계신 권사님을 매 주 찾는 일이 선행되었다. 한 명이 천 명보다 소중한 개척교회에서 목사를 욕하며 떠나는 성도를 축복하는 척이라도 해야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보다 나은 게 없어 보이는데도 교회를 부흥시키는 옆 교회의 목사님을 존경해야 참 목사의 인격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젊은 목사에게 가르치신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며 철야기도회와 교회 청소에 열심을 내는 박사님들. 세상의 지식보다 한 발 앞선 상식과 식견을 지닌 겸손하고 신실한 집사님들. 서로의 장점을 존중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목사님과 장로님들. 이런 화해가 교회에서 이루어질 때 편견과 증오로 사분오열된 세상이 다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로 회복될 가능성을 지닌다. 교회가 먼저 화해를 이루지 못하는데 과연 세상이 어디에서 희망과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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