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왕의 남자'가 관객 천만 명을 훌쩍 넘겨 최고의 흥행에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영화가 연산군이라는 한 남자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 외로움을 다루었기에 영화 ‘왕의 남자'는 깊은 공감을 끌어냈었습니다.

단절은 깊은 외로움
그는 일찍이 어머니가 선왕인 아버지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음으로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는 왕이 되었으나 진정한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속내를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연산군은 사람들을 향한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광대 ‘공길'을 만난 사건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연산군은 ‘공길’이 천한 광대였지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공길'로 인해 웃을 수 있는 시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연산군의 인간적인 고독과 외로움에 동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산군은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었지만 혼자였기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교제하는 삶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살도록 지으시지 않고 함께 살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함께 교제하며 기쁨을 나누면 배가됩니다. 우리가 함께 교제하며 슬픔과 아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듭니다. 우리는 함께 하면 삶이 풍성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들을 극복하고, 함께 교제하는 삶을 통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교회 밖의 사귐, 교회 안의 사귐
교회에서의 사귐, 즉 교제와 교회 밖에서의 사람을 사귀고 교제하는 것의 차이는 ‘너와 나 사이’에 예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본문 말씀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그의 유명한 저서 ‘나와 너’에서 ‘나와 너’사이에 아무리 최선의 인격적인 교감을 가져도 ‘영원자 당신’과의 만남이 없이는 우리의 만남은 온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단절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야 했던 이유였습니다.

성도와의 사귐
‘교제(코이노니아)'란 성도들 간의 사귐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제는 세속적인 사귐과는 달리, 주님과의 교제를 전제합니다. 주님과 교제하면서 ‘보고 듣고 만진 바'를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의 성도간의 사귐입니다. 세상에서 감정에 기초하여 사귀다가 쉽게 싫증을 느끼고 돌아서는 사귐과는 다릅니다.

예수님 통한 온전한 사귐
사람 간에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명제는 부부간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혼하는 가정도 점점 늘어갑니다. OECD 국가 중에서 노인의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와 나 사이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전제된다면 온전한 사귐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단절된 관계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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