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있다 보면 보지 말아야 할 것도 보고,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또 가지 않았으면 하는 자리에도 가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답답할 때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 때입니다. ‘교단을 위해서’라고 스스로 이유를 만들기도 합니다만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가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폭발할 때도 있지만 이야기하지 않음만 못한 공허함이 밀려듭니다.

가끔 교단 안팎의 선배들과 목사님들로부터 “언제까지 신문사 일 할 것이냐?”는 질문을 듣습니다. 소명을 깨달아 신학을 공부하였으니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하지 않느냐는 애정이 담긴 표현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에게 그 부름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 배운 바 원칙에 맞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지…, 쉽지 않은 결론 앞에 망설여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답을 얼버무릴 때도 있고 ‘준비 중’ 이라고 대충 둘러대기도 합니다. 또한 ‘목회’라는 사역의 폭넓음을 명분 삼아볼 때도 가끔은 있습니다. 아무튼 선택의 시기는 이르렀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방향에서 결론을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앞서의 질문과 비슷하지만 다른 뉘앙스의 말도 자주 듣습니다. “언제까지나 신문사 일 할 줄 아느냐!”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앞으로 목회할 때 편하려면 선배들에게 잘 보여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면 되느냐’는 뜻일 겁니다. 사실 무서운 말이고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에 문제점이 있습니다. 제가 파악하고 느낀 바에 의하면 자기 혼자 독불장군처럼 교회를 개척하고 자기만의 목회 영역을 구축하지 않을 요량이라면 지방회 선후배 관계, 인간관계를 잘해야 합니다. 교회개척을 할 때나 청빙을 받을 때나 행정처리를 할 때에도 이러한 인간관계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가끔 법과 원칙,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 생겨서, 그리고 개인적 친분이 너무 강하게 작용해서가 문제입니다만 보편적인 범위는 인간 세상에 흔한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린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듯 경기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밤에 잠 못 이룰 때도 있습니다. 그 분이 문제를 제기한 그 이유가 정당한 것은 아닐까? 네가 판단했던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되묻기도 하고, 때론 네가 이러한 말을 들으면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느냐는 원망도 합니다.

글을 쓰고 기자들이 쓴 글을 편집할 때 늘 고민합니다. 내 개인의 생각에 앞서 교단의 관점, 하나님 나라와 성결교회 부흥발전과 성숙을 최고로 여기는 교단신문인 ‘한국성결신문’의 관점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이번 주 행사와 사건을 전제로 한 보도기사의 비중을 어떻게 매길 것이며 ‘탑’과 ‘서브탑’, 각 면의 기사 배치 등을 할 것인가 묻습니다.

기사 중에는 ‘미운 사람’, ‘우리를 공격하는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이 속한 교회와 단체의 기사도 있습니다. 부여된 권한을 조금만 사용해 기사를 줄이고 사진도 슬쩍 빼는 행위가 가능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의 기사를 비판을 듣지 않을 정도의 범위에서 좀 더 키우거나 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열외입니다. 한국성결신문은 ‘언론’임을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기자’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일하고 있고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렇게 일해 오는데도 한 소리 들을 때는 가슴이 미어짐니다. 특히 ‘원수’라 불러도 무방한 ‘신문 공격하는 편’의 사람들이 신문에 상처를 내기 위한 ‘의도 있는 듯한 말’로 할 때는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생각에서, 자기 수준에서 남을 평가하는 것은 알겠는데 똑 같은 인간으로 치부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단에 소문이 많이 떠돕니다. 덕스럽지 않은 이야기도 많고 목적을 가지고 퍼뜨리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사실도 있고 의도적인 왜곡이 이뤄진 이야기도 있습니다. 보도하기 차마 부끄러운 일로 본지가 보도하지 않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 신문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게 됩니다. 취재와 보도 범위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부끄럽더라도, 상처와 아픔이 남더라도, ‘그런 내용까지 보도해야 하느냐’는 질책을 듣더라도 적극성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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