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6:39)

게리 토마스는 “영성이란 예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그분의 삶 속에 나타난 내적 성품과 행동"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영성이 드러나는 상황에 대하여 “우리가 지배하거나 조종하기보다는 섬기기를 선택할 때, 탐하거나 해치기보다는 존중하기를 선택할 때, 과격하기보다는 온유하기를 선택할 때 이 영성이 드러난다. 영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처럼 행하겠다는 선택이다"고 덧붙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 속에서 외면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어지고, 사회 속에서 영향력이 점점 약화되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중 하나는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더 늘어났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도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며 달려들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대하여는 외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회가 지역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주의에 빠져 교회만을 위한 일을 만들어 가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입으로는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의 자리에서 밀쳐낸 후 우리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자기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다보니 결국 갈등만 커지게 됩니다.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보다 정직하여 문제 해결이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주장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 아버지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이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주님도 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가 없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목적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면 끝까지 그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오늘 우리는 과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는가를 되물어 보게 됩니다. 주를 믿는 주의 백성들끼리, 교회와 교단의 지도자들끼리 반목과 갈등, 다툼들은 결국 주님의 뜻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나의 의지를 내려놓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한다면 갈등은 사라질 것입니다. 결코 주님은 다툼과 갈등으로 주님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그 과정도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제3의 길을 찾아보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그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따르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한다면 모든 주님의 일에는 기쁨과 감사와 평안과 연합이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도 함께 갈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