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의란 사람들의 행위를 올바르게 하고 또한 옳은 것을 바라게 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 속에는 공동체를 위해 법질서를 지키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분배의 평등을 추구하는 공동체의식이 그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정의란 준법적이며 평등한 것이고 반대로 비정의는 위법적이며 불평등한 것이다.

▨… 공자는 정의를 힘과 덕의 바람직한 종합으로 보았다. 아무리 내적으로는 성숙한 덕이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덕을 외적으로 실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념에만 머물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내면의 덕이 밖으로 나타나려면 강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데 용기는 힘을 가진 자에게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의 힘은 덕을 구현하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음을 말한다.

▨… 틸리히(P. Tillich)는 기독교적 정의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사랑(Agape)을 기반으로 하는 정의를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연적이지만 사랑없는 힘은 폭력이라는 것이다. 힘이 법이라는 장치에 의해서 합법적이라는 이름으로 지원을 받는다하더라도 그 법이 사랑에 의해 검증받지 않았다면 그 법은 정의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정의의 내용은 사랑이다.

▨…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외치기에만 급급해온 우리 성결교회는 상대적으로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거나 외면해왔음이 사실이다. 자유당 정권이나 유신체제, 군사정권 시절 우리는 정의가 배제된 그 공허한 사랑(틸리히)을 삼류 유행가수가 아는 노래 하나 만을 죽어라고 부르듯 불렀었다. 정의 보다는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 우리의 방패막이였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남았다.

▨… 왜, 갑자기 우리 성결교회 안에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득시글대는 것일까? 무엇 무엇은 법 집행이 잘못되었으니 정의롭지 못하고, 무엇은 법의 원칙에서 벗어났고, 누구는 교단정치꾼이니 단죄해야 정의가 살고… 교단에는 ‘안기부’가 없는 탓인지 모두들 끝없이 용감해지고 있다. 공동체를 지키려는 의지(아리스토텔레스) 없이, 자기희생(공자)없이 정의를 말하는 이들의 속셈은 무엇일까?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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