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영화 제목 ‘떠날 때는 말없이’는 이제 생활의 격언이 됐습니다. 떠날 때를 알고 지난날의 모든 회한을 홀로 가슴에 안고 멀어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남은 자들에게 인간의 따뜻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에게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듣기에도 고상한 ‘절제와 포기의 미학’을 범인(凡人)들이 발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이 이별 앞에서 말이 많아지고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것을 탓하는 것은 가혹합니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에게는 다른 차원의 덕목이 요구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8일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참여정부의 소신과 철학에 반하는 법률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공무원 조직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인수위원회의 방침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국회 심의가 끝나더라도 참여정부의 가치와 성과를 깎아 내리는 법안은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뜻도 강하게 내비쳤습니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이명박 당선자이지만 인수위의 활동을 살펴보면 무엇인가 ‘오버’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 설익은 정책이 허술하게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제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만큼 뚜렷한 책임정치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소수의 지지로 당선돼도 100%의 권력을 행사합니다. 설사 거부권을 행사 한다 하더라도 노대통령이 물러난 뒤 곧바로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는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까지 열어서 새 정부의 구상에 불만을 표시했다면 그동안 느낀 낭패감과 분노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렇다고 떠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참여정부의 패러다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좌파적 국가 개입주의의 강화’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과 시장을 대신해 국가가 경제 질서의 대강(大綱)을 짜주는 체제입니다. 참여정부는 작은 정부 대신 일하는 정부, 효율적인 정부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도덕적이고 온정적이며 일하는 정부가 시장 위에서 적절한 역할을 하면 역사가 진보한다는 신념에 차 있었습니다. 통합과 균형, 분배, 복지, 약자보호가 그 핵심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꿈꾸던 변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양극화는 더욱 심해져 곳곳에서 민생고를 호소했습니다.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 가운데 한 마리도 포획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의 절제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끝없는 논란거리로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말만 앞세웠지 실천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정부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참여정부에 ‘참여’한 사람들은 유력 언론의 적대감이 모든 것을 과장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은 바보가 아닙니다. 언론이 제시하는 ‘아젠다’에 일시적으로 끌려갈 수는 있지만 5년 내내 휘둘리지는 않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은 참여정부처럼 하지 말라는 뜻을 ‘한 표’로 행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정부 보다는 작은 정부, 명분적 가치보다는 민생을 살리는 실용을 요구했습니다.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습니다. 지금은 새 대통령과 인수위원회가 그런 국민의 요구를 실천하고 있다고 봐야합니다. 치명적 오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선택된 정부가 구상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필부(匹夫)들의 ‘속 좁은 몽니’를 부린다는 비난을 듣지 말고 ‘떠날 때는 말없이’를 실천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6공화국 시절 전두환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는 결정에 ‘구세력’이 반기를 들었다면, 그리고 참여정부 초기 4천억원 대북지원설 특검을 DJ정부가 저항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 해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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