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몽골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어느 중년 남자가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아낙을 두들겨 패고 학대했다. 그 여인의 처지를 보다 못한 주변의 사람들이 여러모로 노력해서 그 아낙이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그 일을 주선해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한 이 사이코패스는 이른 새벽 성당에서 나오는 여인을 죽였다. 같은 이유로 여의사도 죽였다.

▨…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지식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음을 간파하였다. 지식이 많은 사람의 행동이 배우지 못한 사람의 행동보다 언제나 도덕적이지는 않고 배움이 부족한 사람의 행동이 지식계층의 사람보다 언제나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현대의 신경과학자들은 옳은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것 사이의 분열이 사이코패스의 전형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 사도 바울은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고후 1:17)”고 물었다. 육체를 좇는 경영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함으로 해석한다면 사도바울은 예하던 일에서 얼굴을 바꾸어 아니라 한 일이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믿음과 행동이 언제나 하나였던 것이다.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라는 우리들이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 무신론자인 버트런드 러셀의 기독교비판을 우리가 경청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특히 지식계층의 사람들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이중성을 꼬집는 그의 말은 교단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로서는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지 않을까. “지적으로 저명한 인물들 중 대다수는 기독교를 불신하지만 - 이것은 과장이다 - 그들은 대중에게 그 사실을 숨긴다. 혹시 수입원을 잃을까 두려우므로.”

▨… 작은 돌은 작은 파장을 일으킨다. 큰 바위는 큰 파장을 일으킨다. 불특정 다수에게 칼을 휘두르는 사이코패스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은 있다. 모든 성결인들이 교단의 지도부에 기대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다. 그 판단과 일치하는 실천이다. 예할 것에 예하라는 말씀은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총회 결의사항 실천에 수입원이 좌우되는 이들도 아닐테니 기대해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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