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 병사가 들려준 사연은 이와 같았다. 전투 중 공산군에 잡혀 포로가 된 그는 처음에는 공포와 절망에 빠져 있었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신앙심이 깊었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흥얼대면서 찬송을 불렀다. 그러자 한 북한 군인이 자기를 한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한 손으로 미군의 가슴을 짚더니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 것 같았다. 너 예수님 믿니? 그 뜻으로 해석이 되었다. 이어서 한 손으로 자기 가슴에 댄 뒤에 또 두 손을 모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예수님 믿어! 하는 소리인 것이었다. 그리고는 미군 병사가 부르던 찬송을 알아듣지 못할 말로 한 두 소절 불렀다. 그리고는 덥석 두 손을 잡더니 공산군은 한 쪽을 가리키면서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달렸다. 얼마 못 가서 함께 잡혀갔던 미군 포로 수만큼의 총성을 들었다. 구사일생으로 미군에 돌아오게 된 이 병사는 더 이상 북한군을 대적하여 전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형제가 있는데, 그 중에 한 형제가 나를 살려주었는데, 어떻게 그들을 향하여 총을 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소위 집총거부와 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징역을 살다가 풀려난 것이었다.
서로 살기 위해서 적군을 죽여야 하는 전쟁터에서,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공산군과 미군, 한국인과 백인 사이에서 신앙으로 확인된 형제애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흔히 신앙에는 국경이 없어도 신앙인에게는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큰 명분은 더 작은 명분을 뛰어넘다.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진 형제관계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보다 훨씬 진한 것이다. 영원한 형제인 북한 병사의 신앙과 미군 병사의 신앙이 위대해 보인다. 나라면 과연 이렇게 행동할 수가 있었을까? 조심스럽게 묻는다.
조국이 많이 어지럽다. 서로 말의 홍수를 쏟아내지만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나와 입장을 같이하면 동지요, 달리하면 대적처럼 대하고 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이 있다. 이 신앙이 나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게 해야 한다. 아무리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라 하여도 믿음으로 엮어지는 위대한 역사가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나라도 사랑하고, 민족도 사랑하고, 가족과 성도를 서로 사랑하는 믿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을 위해서 신실하게 중보함으로,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면서 인정과 칭찬으로 격려하는 믿음을 보여야 한다. 가정과 교회에서, 작은 일부터, 말 한 마디마디부터 믿음을 보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