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3일 국내 최초로 존엄사가 시행됐다. 대법원이 식물인간으로 중환자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77세 환자 가족들의 연명치료장치 제거 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인정한 지 33일 만이다. 비록 의학적으로 ‘회복 불능 환자’의 인공호흡장치를 제거한 것이기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결국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것을 돕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존엄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적 의료장비의 개발 등 현대의학 발달은 단순한 병의 치료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할 수 있게 했고 자연스런 죽음을 어렵게 했다. 죽음의 연장은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키웠고 보험료 등 사회적 비용 또한 증가시켰다. 이처럼 의학발달은 존엄사를 결국 인간에 의해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자연스러운 죽음, 환자가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환자는 생명의 주체로서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남은 마지막 삶을 아름답게 살 수 있으며 가족도 생명연장에 따른 정신적, 물질적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다. 무의미한 생명연장에 투입되는 국가적, 사회적 비용을 다른 환자들에게 투여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는 존엄사를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 환자 가족들의 고통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번 존엄사의 시행이 자칫 생명 경시 풍조를 확대할 수 있고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사실상의 자살을 방조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와 가족들, 말기암 환자들은 이번 존엄사 결정과정에 관심을 보여왔다. 더욱이 ‘회생 불가능한 사망단계’에 대한 불분명한 이해는 치료를 해 볼 가치가 있는 환자임에도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치료행위를 중단할 수도 있고 의료보험제도 등에 지원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자연스러운 죽음’을 이유로 존엄사를 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엄사는 이미 현실화됐고 기독교가 무조건적인 반대 입장만을 피력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함께 ‘회생 불가능한 사망 단계’ 또는 치료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 등 사회적 논의에 함께 참여해 관련 사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의학을 통해 최선의 치료를 하되 더 이상의 의학적 치료가 불필요하다는 정확한 진단이 선행될 수 있도록 하고 호흡기 등 연명치료 장치의 제거 등과 같은 강제적인 방식은 반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소중한 것이며 인간이 함부로 할 것이 아니란 점에서 자연스런 죽음은 인정되지만 ‘품위 있는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죽음이 강요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또한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더불어 존엄사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준 마련과 규정 보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해야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존엄사를 강요당할 수 있는 환자와 가족들을 위해 의료보험제도를 비롯한 국가적 지원과 사회적 지원 방안 마련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교는 그동안 펼쳐온 것처럼 말기암 환자와 같은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호스피스 사역 등 ‘웰다잉’에 관심을 확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높이고 존엄사가 생명 경시로 확대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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