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에 낀 백태가 나아짐이 없다 시니 염려가 크실까 걱정입니다. 이런저런 약을 잡다하게 시험하지 마시고, 다만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생각을 맑게 한다는 제심징려(齊心澄慮) 네 글자를 처방으로 삼으시지요. 약을 쓰지 않고도 절로 들어맞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옮긴이 정민) 추사 김정희 보다 세 살 연하였지만 문하생으로 뒤늦게 이름을 얻은 우봉 조희룡(1789~1866)이 남긴 편지글이다.

▨… 글의 내용은 눈병에 대한 처방인데 그 처방이 여느 의사들의 처방과는 사뭇 다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어서 사물을 정확하게 보는 눈의 기능을 염려할 만도 한데 그가 먼저 제시하는 것은 마음은 가지런히, 생각은 맑게이다. 인간은 우선은 사물을 눈으로 보지만 진정한 본질의 인식은 마음임을 예술가의 본능으로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움의 세계는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 사도바울은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하였다. 믿음의 사람의 ‘참음으로 기다림’은 그림 그리는 이의 ‘제심징려’에 너무도 닮은 마음가짐이 아닐까. 성경은 눈(시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음(마 5:8)을 선언하고 있다.

▨… 총회가 개회되던 날, 오월의 하늘은 화창했지만 햇살은 뜨거웠다. 총회장 입구에서 할머님 한 분이 노란 띠를 두르고 신문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키가 작은 분이어서 띠의 마지막 부분이 겹쳐져 “교단 바로 세우기”인지 “세우자”인지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느 교회 소속인지, 아니면 일당을 받고 동원된 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할머니의 노란 띠에서 우리는 우리의 백태 낀 눈을 볼 수 있었느냐고 물어야 했다.

▨… 교단이 그 할머니의 노란 띠로 바로 세워질 것이라고 소망하는 이들에게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님을 일깨워주어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리라. 아니 그 보다 교단이 바로 세워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행여 백태가 끼지 않았는지 씻어보고 제심징려 네 글자를 처방으로 받아야 하리라.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자야 아무리 성총회라한들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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