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도 슈샤쿠(遠藤 周作)는 소설 ‘침묵’을 통해서 17세기 일본의 가톨릭 박해 상황을 배경으로 하나님은 그를 신앙하는 인간들의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란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었다. 신앙을 부인해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자리에서 고민하는 신부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에게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게 만들었다.

▨… 권력자는 신부의 배교를 강요하면서 그가 보는 앞에서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신부가 배교하면 순박하기만한 농민 신도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같은 상황을 겪다가 배교해서 일본 이름까지 갖게 된 신부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페레이라가 말했다. “신부인 나는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살아가라고 가르쳤어.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시다면…. 확실히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 분명히 배교했을 것이다.”

▨…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귀를 틀어막는 신부에게 배교의 징표로 밟아야 하는 성화판이 주어졌다. 그 판위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었다. 동판에 새겨진 그분이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진 것이다.”

▨… 스승 페레이라는 배교자 베드로, 신부는 배교자 바울이라고 남은 신도들이 이름 붙여 주었다. 끝없는 멸시와 조롱이 뒤따랐다. 살아 있음이 죽음 보다 훨씬 더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라는 사실을 누가 짐작이라도 해줄까. 엔도 슈샤쿠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순교의 원형을 십자가를 지는 삶에서 찾으려 했던 것일까. 진정한 순교는 사랑 때문에 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 그리스도 때문에 천대와 모멸을 감수할, 사랑 때문에 자신을 비울 의지가 없는 오늘의 신앙인들은 순교자의 신앙만 추앙하려든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신앙이기에 공범자들처럼 너나없이 미화에 열 올린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는 우리가 추앙할 수 있는 진실한 신앙이 없지 않느냐는 반증이기도 하다. 순교자의 믿음을 뒤따르려 한다면 기념관 건립도 중요하지만 먼저는 그리스도를 위한 신앙인다운 삶에 정직해져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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