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용 장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날 밤, 한 부부가 자동차로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비바람이 너무 심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듣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긴급 방송이 흘러나왔다.

“시민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이번 폭풍우로 교도소 담이 무너져 일부 죄수들이 탈옥을 했습니다. 낯선 사람이 집에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마십시오. 거리에서 차를 세워도 태우지 마십시오. …” 긴장한 부부는 차문을 잠그고 빗속을 조심스레 나아갔다.

바로 그때, 저 멀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 차를 세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부부는 방송 내용을 상기하며 그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 사람이 뒤에서 차를 향해 뛰어오면서 뭔가를 외치는 모습이 룸미러로 보였다. 창문을 살짝 내리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지 마세요! 저 앞 다리가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끊어졌어요! 제발…”

어느 주막에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한 방에서 묵게 되었다. 두 사람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봇짐 때문이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저 사람이 내 봇짐을 가지고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지?” 이런 걱정으로 각자 봇짐을 끌어안고 긴 밤을 지새야 했다.

밤길에 짐승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게 더 무섭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모든 사람을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스크를 잠시 내리고 있다가도 누군가 다가오면 마스크를 올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항상 의심하라. 쉬지 말고 의심하라. 범사에 의심하라.”라는 성경말씀 패러디가 나올 만하다.

KBS와 ‘시사인’이 조사한 ‘코로나19 이후 신뢰도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걸 얘기해준다. 이 조사에서 신뢰도 1위는 단연코 질병관리본부. 2위는 의료인/의료기관. 그리고 가족, 대한민국, 친척, 청와대, 정부, 한국 국민, 이웃 사람, 지방정부의 순으로 신뢰가 있다고 봤다. 그러나 신뢰가 없는 대상은 OO당, 종교기관, 언론, 낯선 사람, 국회, OO당 순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종교기관은 개신교로 봐야 할 것 같다. 교회를 향한 신뢰가 국회나 언론기관만도 못하다면, 심지어 ‘낯선 사람’만도 못하다면 앞으로 교회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아야 할지 앞이 캄캄하다. 그럼에도 교회는 국민들과 공감대를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낯선 사람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이유는 뻔하다. 대구에서 신천지가 집단 감염을 일으킨 후, 교회 집회에서 감염 사고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들이 방역을 철저히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회들이 방역 수칙을 무시하고 집회를 강행하다 어이없는 감염 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또 정부의 방역 조치에 협력하기보다 교회 탄압이라며 저항하는 모습이 비신자들에게는 어떻게 보였을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감염의 원흉인 신천지를 종교기관으로 보는 관점도 포함돼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비신자들은 종교기관, 교회를 ‘위험한 집단’으로 함께 인식하고, 교인들을 ‘낯선 사람’ 취급을 할 것이다.     

검은콩과 흰콩 한 줌씩이 있다. 그걸 섞는다. 그런 후에 검은콩과 흰콩을 원래대로 구분해보자. 무척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신뢰를 회복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한번 금간 유리를 복원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갈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

더 이상 검은콩과 흰콩을 섞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신자와 비신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다. 교인들만 사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역지사지하면서 비신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나아가 유익을 주도록 노력해야 공존할 수 있다.

코로나19를 통해 교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한국 교회를 고쳐 쓰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읽으며 소망을 갖는다.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신뢰 수준이 ‘낯선 사람’ 수준을 넘어 아는 사람(이웃), 가족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질병관리본부까지는 못 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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