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가?

홍성철 박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구약에서 800여 번,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110여 번 사용된 ‘거룩하다’는 ‘다르다,’ ‘구별되다’의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 다른 모든 민족과 구분되었다. 그렇게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은 당연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방도도 알려주셨는데, 곧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도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노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지만,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다. 그들이 성령의 도움을 갈구할 때 성령충만/성령세례를 경험하며,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살 수 있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거룩한 삶과 성령충만/성령세례를 혼용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나는 순간부터 구별된 삶을 살려고 하는데, 그 과정을 ‘성화’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성령충만/성령세례를 경험하는데, 그 경험을 성결이라고 한다. 문자적으로는 물로 씻어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거룩하다’는 순수한 국어인데, 그 단어로는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기 어려워서 한자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거룩해지는 과정’을 ‘성화’라고 하고, ‘거룩해지는 순간’을 ‘성결’이라고 한다. 성결한 그리스도인들은 의도적으로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런 ‘의도의 순수성,’ 내지 ‘의도의 완전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 ‘기독자 완전’이다.

‘기독자 완전’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으로 완전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비록 순수한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육신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는 절대적인 완전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완전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경험될 것이다.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순수한 의도를 통하여 소극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지만,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조건 없이 사랑한다.

기독교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감정적인 사랑은 이성에 대한 불타는 마음, 자녀에 대한 애정, 음악이나 예술에 대한 애착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의도적인 것이다. 비록 감정적으로는 사랑할 수 없지만,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사랑, 곧 아가페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격 미달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의도 때문에 가능하다.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은 제약이 많을 수 있다. 거짓말과 도적질을 못할 뿐 아니라, 노름도 못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못하는 것은 제약이라기보다는 깊은 자유이다. 그런 부정적인 행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넓고도 깊은 자유를 누리는가!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큰 자유가 있다. 그들은 건전한 음악도 즐기며, 아름다운 예술품을 감상하며, 건강하게 운동도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건전한 연극이나 영화도 즐길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 있는 식물과 꽃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도 있다. 물고기와 새들을 보면서 창조의 신비를 노래할 수도 있다. 거룩한 사람들이야말로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다.

그뿐 아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다른 거룩한 사람들과 정겨운 교제를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교제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느낌을 나누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 이런 교제야말로 천국의 교제를 방불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술과 노름으로 시간과 물질을 허비할 때,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간과 물질을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사용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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