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교회 부흥과 밀양교회, 신례원교회의 시절

길산교회 부흥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사회복지 차원의 접근이다. 6.25전쟁 후, 성결교회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호품을 나눠주며 효율적으로 전도하였다. 이 일은 박종만, 김창환, 최동규 목사가 충청지역의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많은 구호품을 받아서 각 교회마다 신자 수대로 분배했다. 이것은 각 교회에서 불신자들을 전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휴전이 된 후, 국토는 폐허화되고 국민들은 영적 공허와 가난 속에서 헤맬 때여서, 길산교회의 부흥은 중생의 복음전도와 성령의 강한 역사, 구제를 통한 사회선교 차원의 전도가 잘 어우러진 결실이었다. 길산교회는 이 부흥의 힘으로 1964년 무렵 서천교회, 1966년 5월 8일 동산교회를 지교회로 세우는 데까지 크게 확장되기에 이른다.

길산교회는 주일학교의 어린이와 학생 중에 조상환, 이상직, 백병도, 현순종, 양상규, 양정규, 구금섭, 김병곤, 성찬용, 성창용, 이상진, 박재규 등은 목사가 되었고 김종열, 김부열, 양추자 등은 사모가 이옥희, 양규희는 전도사가 되었다. 또 최동규 목사의 자제들인 종진, 종명, 종철, 종인 4형제도 목사가 되어 충성하는 등 주님을 위한 인재양성에도 크게 힘을 썼다.

최동규 목사는 교회가 왕성한 60년대 전반기에 전주, 군산, 조치원, 강경, 서울 등지에서 청빙 타진이 있었으나 한 목회지 길산교회 목양만을 결심하고는 꿈쩍도 안했다. 그런데 60년대 후반에 갑자기 아들을 잃는 상처를 받고 길산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데, 마침 그를 초빙하는 교회가 있어 1967년 부임 18년 만에 길산교회를 사임하고 밀양교회로 옮겼다.

부임 당시 밀양교회는 40명이 모였는데, 여러모로 길산교회에 비하면 형편없었다. 예배당은 마루가 썩어 내려앉고 강단에 서면 손이 천장에 닿았다. 사택도 거의 쓰러져가는 헌 집에 기어서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이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일을 하라고 보냈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곧 신축공사를 시작하고, 1년이 되니 신자가 100명이 넘는 부흥이 왔다. 8년간을 목회했는데 교회의 기둥 장로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교회 재정상황이 심히 어려워 교역자의 생계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최 목사는 이때를 회상하며 “깊은 아픔과 고생의 삶을 산 나의 시련의 기간이었다”고 진단하였다.

1975년 3월 14일, 그는 예산 신례원교회에 부임했다. 우선 할 일은 교회당을 짓는 것, 이를 위해 어떤 장로가 논 400평을 헌납하므로 힘을 얻어 좋은 땅 900평을 구입하여 현재 교회당이 있는 자리를 확보하고 건축을 잘 마쳤다. 빚도 일 년 안에 다 갚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이농현상으로 농촌교회들의 교세가 크게 약화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신례원교회는 그 동안 지역민 중심의 교인으로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교회는 순조롭게 성장하면서 평안하였고, 그는 자주 부흥회 강사로 초대받아 부흥사로 활동하는 등 목회 기간 중에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었다.

최동규 목사의 신앙은 체험적이다. 중생의 체험과 성령세례, 성령 능력의 체험이다. 그의 설교는 사도들의 설교의 원형인 케리그마 설교다.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 앞에서 죄, 회개, 믿음, 구원, 영생이었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딴 것 없어요. 목회도 그렇고 집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심령의 변화를 많이 말했지요. 죄, 철저한 회개, 믿음, 중생을 강조했지요. 영혼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강조하려고 애썼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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