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말씀을 준비하려고 앉았는데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함께 다니던 학교 밑에 새로 생긴 밥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그곳 주인장의 아내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의 사진부 선배였다는 사실과, 주인장이 나의 대학부 시절 교회 은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세상이 이렇게 좁으니 너 나쁜 짓은 못 하겠다” 하고 껄껄 웃습니다. 그런데 아쉽고 씁쓸한 것은, 그 친구는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교회를 멀리하게 된다는 그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양적인 성장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에 대해서는 슬쩍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한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성장에는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는 하지만 그 모습은 교만하기 짝이 없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바라보아야 하는 진정한 푯대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종착역은 구원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마치 갓난 아기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영적인 생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는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자라야 합니까?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푯대를 향하여 죽는 날까지 달음질을 멈추지 않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도달해야 하는 목표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기 원합니다.

둘째, 고통 없이는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육체가 자라날 때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우리 영이 자라날 때도 역시 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순간은 결코 좌절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의 불필요한 부분들이 잘려 나가고 주님 앞에 정금과 같이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주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나오리라”는 고백은 그가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 어마어마한 고통을 성장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는 과정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허물을 벗고 탈피하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장입니다. 세상의 아름답고 눈에 보기 좋은 것들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으로부터 알을 깨고 나오는 진정한 성장을 추구해야 합니다.

셋째, 진정한 성장은 사랑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요 21:18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베드로의 미래의 모습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헨리 나우웬은 이 말씀을 베드로가 그만큼 진정으로 영혼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자신을 내어주게 될 만큼 영적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진정한 성장을 원하십니까? 우리도 우리의 팔을 벌려서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