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에 신앙생활 시작, 2년 만에 큰 은혜 체험

최동규 목사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음력 12월 24일, 충남 부여군 장암면 석동리 288번지에서 전형적인 유교가정의 부 최영의와 모 박정심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나와 독학으로 부여군청에 근무할 정도로 영민했고, 20세 되던 1942년 4월 22일, 홍산교회에 신앙 좋기로 소문난 전 모 집사의 딸 김덕례 양과 결혼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홍역후유증으로 기관지천식을 앓고 있는데 교회에 가면 병도 낫고, 예수 믿으면 천당도 가고 좋다는 유진항 친구(후에 목사 됨)의 전도를 받아 16세부터 마을에 있는 석동교회에 나갔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나아, 한 2년 동안 꾸준히 나갔다.

1941년 겨울, 오영필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가 있었는데 은혜를 받아 철저히 회개하고 중생을 체험했다. 그의 고백이다. “내 죄와 심판을 생각하며 한없이 울며 통회 자복하는 중에 내 심령과 하늘 문이 열리는 듯하더니 ‘네 죄를 사했노라’는 십자가의 은총이 비쳐왔습니다. 동시에 죄의 공포는 사라지고 평화가 임했습니다. 풍랑 만난 바다 같던 마음이 호수처럼 평온하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섰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12월, 일제의 성결교회 강제해산으로 석동교회도 문을 닫았다. 50여 명의 신자들 거의 교회를 떠나고 몇몇이 10여 리 떨어진 규암감리교회를 다녔다. 당시 대구장로교회에서 부여 친척집으로 피난 온 서남도 장로가 규암, 은산 등의 감리교회에서 설교하였는데, 마침 은산면 사무소에 출장 왔던 최동규가 시간 여유가 있어서 교회심방을 따라갔다.

심방설교를 마치고 서 장로가 “기도합시다” 하는데 갑자기 다들 와~ 하고 우는 것이다. 순간 급한 바람 같고 폭포수 같은 은혜가 최동규 청년에게도 임했다. 그때 “앞서간 선지자들이 방방곡곡 다니며 복음의 씨를 뿌렸는데 거둘 자가 없다”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최동규 청년이 저도 모르게 “주여,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변했다.

“아, 제 발은 땅에 닿았으나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죽어가는 영혼과 민족의 상황을 생각하니 눈물뿐이었습니다. 안방에 가서 부모님에게 ‘아버님, 불효했습니다’ 하고는 울었습니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뒷산에 가서 한없이 찬송을 불렀지요.” 그의 고백이다.

이때부터 전도의 사명에 불타 영혼과 민족과 사회를 불쌍히 여기며 뜨거운 가슴으로 자나 깨나 울었다. 교회출석을 그만둔 백승하 친구를 찾아가 전도하여 다시 믿게 하였는데, 후에 같이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전도에 불탔던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간증이다.

“당시 나의 전도라는 것은 상대편의 어려움을 나눠지고, 병든 사람을 만나면 ‘주여, 저 사람의 병을 내게 주시고, 저 병을 고쳐주세요’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지요. 내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며, 좋은 음식은 남에게 먼저 먹이고 좋지 않은 것은 내가 먹고, 쉬운 일은 남에게 하게 하고 어려운 일은 내가 하는 이런 예수정신으로 했어요.”

최동규는 이런 정신으로 부모님을 시작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했고, 또 직장인 군청에서도 동료직원들에게 끊임없이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예수에게 미쳤다’고도 했지만, 그는 그 말에 너무 좋았다. 그는 또 간증했다. 

“그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진리의 말씀이었고, 가만히 있어도 사랑이 흘러나왔습니다. 누가 구원받는다면 그를 위해 내가 죽어도 기쁘게 죽을 것 같았어요. 몇 년을 이렇게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경험 속에 천국생활을 맛보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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