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 어쩌면 우리시대를 콕하고 꼬집어낸 것처럼, 이렇게 꼭 들어맞는 표현을 디킨스는 찾아냈을까. 프랑스혁명 전야의 암울한 시대상을 가감없이 제대로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 시대를 규정한 그의 글은 마치 오늘의 시대의 감춰진 모습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날카롭다. 하기는 오랜 감방생활에서 석방되었으면서도 자기집 거실에 감방을 마련해야 하는 「두 도시 이야기」의 주인공을 우리가 닮고 있음을 뉘라서 부정할 수 있는가.

▨… 코로나19로 주일예배만 드리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많은 교회에서 예배참석인원이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규모가 작은 교회일수록 그 감소폭은 역비례로 커져가고 있다. 그렇더라도 주일예배 이외의 모든 모임이 중지되어 교회의 교육, 친교, 봉사, 전도활동이 모두 사라져버린 교회를 붙들고 그래도 씨름해야 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자기 집 거실에 감방을 만들고서라도 삶의 길을 찾아야 하는 석방된 복역수의 모습과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 코로나19로 위축된 나라의 경제 여건은 교회의 헌금생활까지 뒤흔들고 있다. 작은 교회들은 그 거센 파고를 맨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어 이미 만신창이의 상처를 입고 있다. 총회나 지방회라고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겠느냐고 자문자답해야 하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지킬 자기집 거실의 감방을 마련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하고 있다.

▨… 또 교인들이 「두 도시 이야기」의 복역수가 감방에 익숙해지듯이 예배드리지 않는 텅빈 교회에 익숙해져버린다면 그 결과는 무엇으로 나타날까. 허울만 새시대의 예배인 영상예배는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성례전으로서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의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가 그 실체를 잃게된다면, 기독교 2000년 전통의 교회는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어디로 인도하게 될까. 누군가 대답 좀 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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