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회전도와 개척

이종무 목사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조선독립운동은 조선의 기독교가 앞장섰었다. 일본경찰과 헌병들은 조선의 기독교지도자들을 더욱 감시하고 탄압했으며, 외국선교사들에게 대하여는 한 층 더 엄한 감시와 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토마스 선교사 역시 다른 외국선교사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역시 일본관헌들에게 감시를 받았다. 토마스 감독은 3·1운동 직후여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름휴가 때를 이용하여 예년과 다름없이 지방순회를 했다.

동양선교회는 1919년 3·1운동이 있은 뒤에 강경에 전도관을 신축하기로 했고, 당시의 포교규칙에 의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았다. 토마스 감독은 새로 구입한 강경의 전도관을 시찰하기 위해 3월 17일 경찰서에 가서 여행신고를 하고 3월 19일 강경에 간다는 전보를 보낸 다음 3월 20일 영사관에 가서 여행신고를 했다.

강경은 가장 유명한 포구 중 하나로 인구가 1만 여명이나 되는 상업중심지였다. 동양선교회는 물류의 중심지 강경에 전도관을 개척하기로 하고 1918년 가을 정달성을 파송하여 조선집 두 칸을 얻어 그해 12월부터 교회를 시작했다. 그러나 예배장소가 초라한 이유로 전도하면 “여보시오. 염치도 없이 그런 곳으로 누구더러 오라하시오”라는 핀잔을 들었다.

토마스 감독은 1919년 3월 20일 이장하 목사를 대동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러 강경에 갔다. 강경평야 한복판에 자리한 강경 읍내를 한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강경봉화재에 올랐다. 공원처럼 아름다운 전원도시 강경읍내와 맑고 푸른 강물이 흐르는 거울 같은 금강이 내려다보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기분이 아주 상쾌하여 자기도 모르게 저 뵈는 “천당 집 날마다 가까워/ 내 갈길 머지않으니/ 전보다 가깝다/ 더 가깝고 더 가깝다/ 하루길 되는 내 본향 가까운 곳일세.” 이렇게 찬송을 부르고 있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3월 21일 토마스는 영사관에 가서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이것은 즉각 영국영사관의 주목을 받았고 대리총영사인 로이드는 자세한 진술서를 받았다. 토마스가 영사관에 진술한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3월 20일 목요일 나는 오후 3시에 강경에 도착하였다. 4시 경에 나는 설교자의 사택과 전도관을 살펴보기 위해 나갔다. 그 땅을 살펴보는 동안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언덕을 내려오면서 “만세”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깃발을 흔들며 우리 곁을 지나쳤고 곧 사라졌다.

그러자 몇 분 후 권총을 들고 있는 네 명의 군인이 달려왔고 그들 뒤에 몇 명의 순경이 따라왔다. 그들은 우리일행을 잡아 때리고 무자비하게 발로 찼다. 그들은 한 마디의 설명도 들으려하지 않고 우리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 끌려가는 도중 순경에게 여권과 여행증명서를 보여줬다. 그러나 순경은 그것을 살펴보지도 않고 땅에 던져버렸다.

그것을 땅에서 주우려 하자 나를 넘어뜨리고 머리를 여러 차례 때리고 발로 찼다. 이때 많은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구경하고 있었는데 한 일본인이 팔뚝만한 무거운 몽둥이로 나를 쳤다. 두 명의 한국인 사역자들도 잔혹하게 매를 맞았다.

한국인 사역자 한 명은 얼굴에 상처가 났고 피가 흘러나왔다. 경찰서에 도착해서도 한국인 사역자들을 때리고 발로 차는 것을 보았다. 나는 혼자 독방에 갇혔다. 경찰서장이 들어오자 그에게 한국인 사역자에 대한 만행에 항의했고 서장은 미안하다고 말하고 호텔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거절했다. 서장에게 만세 부른 젊은이의 행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항의했다.

서장은 다시금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일본어로 쓰인 두 장의 서류에 사인하라고 요청했다. 나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기차가 8시 40분에 떠나기 때문에 그들은 인력거 두 대를 보냈고 두 명의 경찰관이 호위했다. 일행은 대전행 기차를 타고 그날 밤 대전에서 머물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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