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담담하게 맞는 실력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온 지구를 난폭하게 휘젓고 돌아다닌다. 큰 나라 작은 나라들을 휩쓸고 다니며 천하보다도 더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문명국이건 저개발국이건 그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나라가 없다. 필자가 사는 미국만 해도 그로 인한 사망자만 10만 명을 넘어가고 있다. 그것도 뉴욕, 가장 문명화된 최첨단 도시에서 감염자와 사망자가 가장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러다가 코로나19가 지구 위에서 사람의 씨를 싹 말려놓는 것은 아닐까. 도대체 치료약이나 완치의술은 언제 실용화 되나. 하룻밤 사이에 뚝딱 찍어내면 참 좋겠다. 아무튼 그 일에 불철주야 머리 싸매고 헌신하는 분들과 환자 치료에 고생하는 분들에게 우선 큰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최우수관리상을 받을 만큼 모범국가가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아무튼 문제의 본질은 이 같은 죽음의 폭풍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는 울부짖음으로 요약된다. 과연 죽음의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는 있는 비법이 있기는 한걸까. 쉽지 않지만 희망을 가져보자.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지 않던가.

인류의 온 문명은 바로 삶과 죽음, 특히 궁극적인 삶과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개인의 문제도 똑 같다.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삶과 죽음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바로 인간의 삶과 죽음,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에 가장 철저하게 관심을 갖는다. 그것이 바로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틀 제단에 가장 잔인한 제물로 바치신 근본적 이유가 아닌가.

담임목회를 할 때 신앙특수훈련 프로그램을 여러 해 실시했었다. 주제는 ‘예수님처럼, 꼭 예수님처럼’(Like Jesus, Just Like Jesus)이었다. 참석자들이 3박4일 동안 전화도 끊고 시계도 차지 않고 성경공부와 기도에만 전심했다. 지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금식도 하면서 체험으로 배웠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의 최절정은 ‘십자가대행진’이었다. 참석자들이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한 시간 정도 산 정상까지 오르게 된다. 숨을 헐떡이고 비지땀을 흘리면서…

그런 다음 십자가를 땅에 내려 눕혀놓고 ‘관 속에 들어가서 10분간 누워 있기’를 체험한다. 담임목사인 내가 첫 시범을 보였다. 프로그램을 할 때마다 한 번씩 했으니까 수차례 관 속에 들어가 누워 있는 시체체험을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돌무덤 매장, 부활을 자기화하는 신앙교육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와 함께 모여 간증을 나눈다. 눈물과 콧물을 모두 쏟아내며 교회의 언어로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된다. 필자의 경우, 관에 눕자마자 안내원 두 사람이 뚜껑을 덮고 못질을 했다. 그 못질 소리에 공포심이 몰려왔다. 만약 지진이라도 나서 이 토굴이 무너지면… 예수님 십자가 못 박히실 때에도 지진이 있었다.

그렇게 여러 번을 했는데도 할 때마다 겁을 먹곤 했다. 신자들 앞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소름 끼치는 체험이었다. 하지만 그 때 그 ‘관속에 10분간 누워 있기’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현저하게 줄여 주었다. 아직도 죽음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수준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실존적인 고백을 하셨다.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 사형집행을 면제해 달라고 읍소하신 것이다.(마26:38).

코로나19의 지구적 재앙이 좀처럼 쉽게 수그러질 것 같지 않다. 예방백신이나 치료약이 어서 속히 온 지구에 보급되기를 간곡히 기도한다. 하지만 치료법과 특효약이 개발되었다고 해서 온 인류 죽음의 문제가 모두 속 시원히 해결될 것도 아니다.

차라리 죽든지 혹은 살아남든지, 이번에 죽음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는 실력, 그거 하나 확실하게 키운다면 어떨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결국 죽고 말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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