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850개 교회, 경상비 17억 원 불구 전 교회 경상비 10%, 교역자 생활비 십일조

“이제 우리 교회는 전교인을 성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여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요원으로 훈련하여 주어진 사명을 다하게 하고, 민족 복음화와 나아가 아시아 복음화 기수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이 큰 뜻을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는 선교기념관을 건립하였다.”(1977년 교단 창립 70주년 기념대회 선언문 중)

현 총회본부 건축은 그렇게 시작됐다. 성결교회가 이 땅에 사중복음의 기치를 드높이 들고 복음을 전한지 70주년을 맞아 이제 민족을 넘어 세계복음화를 향한 선교대명을 수행하기 위해 선교센터를 세우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내 교단은 내 힘으로’라는 운동을 벌여왔던 교단은 이제 시련을 딛고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한 만큼 더 큰 선교를 감당하기 위해 1976년 제31회 교단 총회에서 ‘70주년 기념 선교센터’ 건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민족 복음화와 아시아 선교를 위한 전도훈련, 각종 교육 훈련, 총회본부 및 기관사무실 제공 등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총회본부’로 부르지 않고 ‘선교센터’ 또는 ‘선교회관’으로 불렀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선교회관 건립 공사는 곧바로 착공하지 못했다. 1977년 전국적으로 중앙대회와 지방대회가 열려 기념관 건축에 모든 힘을 쏟았지만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8년에도 당시 총회장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진척이 되지 않았다. 다만 1978년 3월 2일 임시총회가 소집돼 70주년 기념관 신축 예정지를 변경했다. 부담액도 조정하여 기념관 신축에 대한 전열을 다시 가다듬었다.

새로운 선교센터 건축용지는 당시 미개발 상태에 있던 서울 강남이었다. 한국성결교회 최초 건축지인 서울 무교동 12번지를 첫 후보지로 정했지만 부득이 한 사정으로 서초동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대치동 890-56번지로 최종 낙점되었다. 무교동 대지 매도 대금 1/3(172,666,666원)과 부흥대책위원회에서 모금한 1억원을 바탕으로 대치동 땅 240평을 마련했다.

건축을 추진하던 1977년 당시 성결교회 교세는 856개 교회 세례교인 수 6만5554명, 성결교회 전체 경상비는 17억5800여만원에 불과했다. 헌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못하여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갈수록 헌신과 열정이 더 쌓여갔다. 충남과 광주지방회에서는 지방대회를 열고 선교센터 건립을 위해 수백만원, 수천만원을 헌금했다. 경북서 전북 대전 광주 충남 서울서 전남 인천지방 등 거의 모든 지방회가 선교센터 건립을 위해 교역자 한 달 사례비를 바치기로 결의했다.

총회본부 직원들도 1개월 봉급을 헌금했다. 1977년 헌금 약정액만 9,820여만원에 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지방회에서 교역자들이 1개월 월급을 헌납하는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성결교회 교역자들은 가장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도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심정으로 숭고한 믿음과 희생적 정신으로 일치단결하여 70주년 기념사업과 선교센터 건립 안건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우리 성결교단이 선교사상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분기점이 되어야 하겠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뿐만이 아니다. 각 지방마다 교단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선교센터 건립을 위해 70주년 중앙대회는 물론 지방대회, 개교회 단위로 특별집회도 개최했다. 집회에서는 선교회관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집회에 들어오는 헌금을 기념관 건립 자금으로 바치기도 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각 지 교회 경상비 결산액의 십일조를 기념관 건립자금으로 총회에 상납토록 했으며, 세례교인은 교단 기념관 건립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의무적으로 적극 참여토록 했다.

인천지방회의 경우 교단창립 70주년 기념관 센터를 완공하기까지 각 지 교회와 기관별 집회를 지양하고 모든 성회를 기념관 건축을 위한 집회로 일원화시켰다. 특히 총회기념관(성결회관) 건립비와 연금을 완납치 않는 교회에 올리는 각종 청원을 보류하는 지방회도 있었다.

이런 열기에 힘입어 한국건업주식회사와 건축계약을 체결하고 1978년 11월 27일 마침내 성결회관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기에 쉽지 않았다. 1979년 5월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34회 교단총회에서는 부족한 건축비 1억원을 충당하기 위해 임원과 지방회장 연석회의를 열고 부족한 건축비를 모금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당시 홍순균 총회장은 “이 일을 위한 재정확보에는 여러 어려움이 예상됩니다만 우리는 위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심정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금 뿐 아니라 선교기금을 모으는 일에 적극적인 협조가 있어야 하겠다”고 호소했다.

당시 부총회장 고 홍기득 장로와 건축분과 사무국장 고 임용희 장로 등 평신도들이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홍 장로는 회갑연을 열지 않는 대신에 총회본부 입구 벽에 ‘양치는 예수님’의 조각상을 기증했다.

성결인들의 눈물의 기도와 정성으로 1979년 8월 마침내 총회본부를 준공하여 성결교회의 강남시대가 열렸다. 건축비는 4억3000만원이 소요되었다. OMS에서 20만 달러를 헌금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종교용 건물의 건평 제한이 1000평이었기에 999평에 지상 높이 39m, 지하 1층 지상 10층으로 강남에 우뚝 섰다. 성결인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 되어 똘똘 뭉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념관 건축은 교단 전체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단합된 헌신을 하게 한 구심체가 되었다.

이처럼 앞서간 우리 선진들은 성결교회 100주년을 내다보고 서울 강남에 70주년 선교기념관을 건립했다. 그 기념관을 중심으로 우리 성결교회는 잠실벌에서 100주년을 치렀다. 이제 총회본부 재건축을 통해 더 위대한 성결교회 시대를 활짝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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