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5월30일, 성결교회는 감격스러운 희년을 맞게 되었다.

성결교회는 1954년 총회에서 1957년을 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준비위원을 선임하여 착실히 준비했다. 1954년 9월 28일에 무교동 중앙교회에서 희년기념사업위원회 전원이 모여 희년기념사업위원회 규약을 정하고 임원을 조직했다. 위원장에는 이명직, 부위원장에는 김창근 강송수, 총무에는 황성택, 협동총무에는 안창기 김중환 김신한, 서기 조명석, 부서기 이천영, 회계 천순봉 조인정 등이 선임됐다. 고문에는 피얼스, 카우만 부인, 어니박사 헤인스 등이 선임되었으며 서무부 전도부 섭외부 재정부를 두었다.

희년기념시업위원회는 기념관 건축, 1000교회 증설 운동, 이명직 목사 저작집 간행과 함께 기념식을 1957년 4월에 갖기로 했다. 또한 천순봉과 조명석을 상임위원으로 배치하였으며, 1955년에는 성결교회약사와 희년 기념 설교집 발간 사업을 추가로 계획했다.

기념관 건립은 모금이 불가능하여 보류했으나 선교부에서 1천500만환을 담당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총회에서 1천500만환을 거출하여(무교동교회 500만환, 전국교회 500만환, 독지가 500만환) 성결교회의 발상지인 무교동 중앙교회에 건립하기로 했다. 희년기념식은 1957년 4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신학교 교정에서 거행하기로 확정했다.

이렇게 준비된 희년을 맞은 성결교회는 교역자 497명, 교회 430개소, 장년신도 5만3693명, 유년신도 5만4528명 등 계 10만8221명으로 성장했으며, 6·25전쟁으로 인한 필연적 사실로 전쟁고아와 과부들을 위하여 고아원 42개소, 모자원 5개소, 양로원 1개소, 소년관 2개소가 신설되었고 5개의 교단소속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교단 산하기관으로 청년회전국연합회, 신생부인회전국연합회, 유년주일학교전국연합회가 조직되었고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유지재단, 재단법인 예수교동양선교회유지재단,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사회사업유지재단이 설립되어 있는 등 부쩍 성장한 모습이었다. 성결교회의 희년은 온갖 파란곡절과 풍상을 다 겪고 난 후에 맞는 것이었기에 그 감격은 더욱 더 클 수밖에 없었다. 활천은 희년을 앞두고 그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금년은 우리성결교회가 창립된 지 50주년 되는 희년이다. 우리는 그동안 성서적 순복음을 이 땅에 전파하였고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지도하여왔다.

반세기를 흐르는 세월 동안에는 교계의 몰이해로 인한 방해를 받았고 제국주의 일본의 정치적 탄압으로 인한 핍박도 받았으며 해산의 비운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복음의 역사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꾸준히 계속되어 오늘의 희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감개무량한 사실이다.(중략) ……

희년을 당한 성결교도여! 복음의 나팔을 힘껏 불어 여호와의 희년을 선포하라. 남쪽에서도 불 것이요 북쪽에서도 불 것이며, 서에서도 외치고 동에서도 외치라. 희년이 왔다! 희년이 왔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인한 대자유(大自由) 해방의 희년이 왔다.” <계속>

※지난 1월 12일자 ‘전시교단총회 그리고 복구와 재건 ④’의 글 중 한국의 군목제도는 1951년 2월7일 육군일반명령 제31호로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가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는 기록에 대해 애독자께서 ‘군목과’라고 지적해주었다. 그러나 현재 육군군종사(육군군종감실발행) 40쪽에 군승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근거로 하였음을 알려드리며 계속적인 관심을 부탁한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