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성서학원의 창립

이종무 목사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신학교를 세우는데 최대의 관심을 기울였다. 동양선교회의 기관지인「전보」(Electric Messages) 1909년 10월호에 의하면 한국선교는 선교사보다 토착민을 훈련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아직 한국에는 성결계통의 성서학원은 없고 기존교파가 토착사역자를 양성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일 년 내내 쉼 없이 성서학원을 운영하는 곳은 없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에 성서학원설립의 당위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성서학원이 세워지게 되면 일본의 도쿄성서학원보다 더 커지게 될 것이며 학생들은 약 100명을 수용하게 될 것이고 그 비용은 약 1만 달러가 소요될 것이라고도 했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에 부임한지 4년만인 1911년 3월 13일에 무교동에 있는 중앙복음전도관의 예배실을 임시교사로 하여 경성성서학원을 정식으로 개원했다. 성서학원의 설립목적은 전격적으로 이단과 속화와 죄악을 대적하여 분투하자는 주의 하에서 남녀 전도자를 양성하여 순복음을 동양 전체에 전파하며 영혼을 구원할 목적이라고 했다. 토마스 목사는 성서학원을 개원한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교수하는 시간 외에는 새 교사를 지을 교지물색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뜨거운 여름이었던 어느 날 아침 일찍 한 점잖은 한국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들이 학교를 세울 터를 찾는 분입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가 말하기를 “저는 왕실의 집사입니다. 주인어른께서는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일부를 당신들에게 팔려 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장소는 200년 동안 구황실일가 한 가문의 소유로서 놀랄만한 귀중한 것이었다. 이곳은 서대문건너편에 위치한 죽첨정(竹添町) 3정목 35번지 애오개 마루턱이다. 이 애오개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은 주로 대현동 사람들이었다. 대현동에는 대장간이 많아서 연장이나 유기제조를 많이 하는 곳이었다.

그곳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서대문을 통해 장안으로 들어가서 온종일 대장간에서 만든 유기그릇이나 연장을 판 후 저녁에 돌아오는 근면한 사람들이었다. 아침 해와 저녁 해를 안고 다니는 건실한 사람들이었다. 

토마스 원장은 임시교사에서 수업을 마치자마자 서대문 밖 애오개로 올랐다. 한눈으로 서울장안을 내려다보며 “이 터에 저 성 곧 서울장안을 점령할 군병들을 양성할 집을 지을 것인데…”라면서 혼자 기도하고 건축 상황을 돌아보는 일은 벅찬 일이었다.

그 때에 카우만 총재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길보른 목사(Ernest Albert Kilbourne) 내외는 도쿄의 임지로 돌아가지 않고 토마스 원장을 돕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토마스 원장에게는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바로 이때에 길보른 목사의 2세로서 20대 청년 버드(Bud) 길보른이 원장을 도우러 한국으로 왔다. 버드는 에드윈 길보른(Edwin W. Kilbourne) 선교사인데, 어렸을 때 즐겨 불렀던 이름이다. 토마스는 버드가 건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청년이기에 성서학원의 건축을 그에게 맡겼다. 버드가 성서학원 건축 감독을 맡게 되자 길보른 내외는 일본 임지로 돌아갔다.

약관 20세의 그는 토마스를 친아버지처럼 여기고 존경하며 따랐다. 토마스 원장은 그의 총명하고 재치 있는 열정에 탄복했다. 토마스 감독은 하루 속히 아무 사고 없이 학교건물이 완공되기를 격려하며 기도로 후원했다.

약 15개월에 걸친 성서학원의 건축은 1912년 봄에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1912년 6월 10일에 성서학원학생들이 새로 마련한 2층 신축교사로 이사했다. 새로운 건물은 강당, 남자기숙사, 여자기숙사, 식당, 선교사의 집으로 이뤄졌다. 모든 시설은 스팀난방이 되었으며 위생시설도 갖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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