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말씀묵상> 요3:9

우연히 작은 책자에서 칼 힐티(Carl Hilty)의 저서‘삼월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겨울은 지나고/ 봄은 아직 오지 않고/ 생명과 대기와 빛을 찾아/내 마음 죽을 것만 같네/ 대지는 그 낡은 고뇌로/ 나를 깊이 인도하고/ 꽃을 꿈꾸며 봄을 노래하면/ 새로 흩어지는 눈 꽃송이/하나 눈에 묻혀/ 초록의 새싹이 움튼다./ 주여, 당신의 비밀의 뜻은 기필코 이루어지고 말 것을…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은 불가항력적으로 다시 오는가 봅니다. 제가 목회하는 이곳 해안지역에서 매년 경험하는 것은 꽃 피는 봄에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삼월, 심지어는 사월에도 꽃 시샘하듯 눈이 내릴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계절의 흐름인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어김없이 봄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이지만 제게는 신비스럽습니다.

성도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힘들고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시련을 당할 때인 것 같습니다. 조용한 듯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살을 에이는 듯한 엄동설한과 모진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칩니다. 이 때 성도들은 나름대로 애를 써 봅니다. 당황해 하면서 회개도 해 보고, 감사를 잊지 않았는가 싶어서 감사의 예물을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봉사가 부족했나 싶어서 열심히 헌신과 봉사도 해 보고, 전도도 열심히 해 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시련은 그칠 줄 모르고 반복됩니다. 그때마다 종종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의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이신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어느 날 저는 성경에서 그 답을 깨달았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아하! 그렇습니다. 계속되는,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뭔가 나를 통해서 당신의 나타내시기 원하시는 완연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지금은 모르는 신비스런 일일 것입니다. 그냥 그 말씀을 믿어 봅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말씀이 진리라면 나에게 있어서 불행은 결과적으로는 불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까요? 뭔가 나를 사랑하셔서, 아껴 주셔서 갈고 닦은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한 섭리일 것입니다.

전남 신안에서 목회하는 동기 목사님 집에 휴가를 갔던 때가 있습니다. 바닷가에 갔다가 밀물과 썰물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쏴-악” 밀려오고 “쏴-악” 밀려가고…. 그런데 밀물을 보니 밀려오는 물이 많습니다. 썰물은 반대로 밀려가는 물이 많습니다. 결국은 밀물은 만조를 이루게 되고 썰물은 바닥을 드러내는 것 아닙니까?

이 밀물과 썰물을 보면서 성도의 삶도 이와 같다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일이 잘될 때도 있고 잘 안될 때도 있지만, 결국은 잘되는 일이 많고, 그래서 말년이 될수록 야곱이 꽃수레를 탔던 행복의 만조를 향해 가는 삶인 것입니다. 야곱 뿐이겠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요셉, 다윗…. 만일 우리에게 있어서 썰물이 있다면 뭔가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특별한, 그리고 일시적인 시련의 기간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족함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아직도 시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시련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특별한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의 문턱에서 때로는 산에 간헐적으로 눈이 내리지만 결국은 완연한 봄이 산에도, 뒷동산에도 찾아와 온누리에 생명의 봄기운이 감돌 듯 결국은 시련의 쓰라림은 지나가고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봄이 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니 봄이 더디 온다고 실망하지 말고, 초조해 할 필요도 없고 믿음이라는 날개를 펴고 기도라는 날개를 펴서 높이 비상하며 하나님 은혜의 동산이 만조를 이룰 때까지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림이 좋을 듯 합니다.

이대성 목사(강원서지방·해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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